8월 2일 월요일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예기치 못한 일은 노인이 되는 것이다. <트로츠키>
뜨락에서 은방울 흔들리는
조 지 훈
뜨락에서
은방울 흔들리는 소리가 난다.
아기가 벌써 깼나 보군
창을 열치니 얄푸른 잎새마다
이슬이 하르르 떨어진다.
이슬 굴르는 소리가
그렇게 클 수 있담
꿈과 생시가 넘나드는
창턱에 기대 앉아
눈이 다시 사르르 감긴다.
봄잠은 달구나
생각하는 대로 꿈이 되는,
희미한 기억의 저 편에서
小女들이 까르르 웃어댄다.
개울 물소린지도 모르지
감은 눈이 환해 오기에
해가 뜨나 했더니
그것은 피어오르는 복사꽃 구름.
아 이 아침 나를
창 앞으로 유혹誘惑한 것은 무엇인가
꽃 그늘을 흔들어 놓고
산새가 파르르 날아간다.
* 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 의미를 박탈해 가는가? - 1996년 프랑스 대학입시 수학능력고사(바칼로레아) 논술 문제
인류학에 따르면 인간만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한다. 생며의 유한함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무가치한 것일까 아니면 가치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 오히려 에너지를 충전시켜 주는 것일까?
죽음은 인간 존재로부터 모든 의미를 박탈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일상 행위에 개입함으로써 생에 보다 깊은 의미와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일까?
결론
죽음이란 인생의 의미를 박탈하는 것이라기보다 인생으로 하여금 수없이 다양한 생의 의미를 창조토록 하는 것이다.
생의 의미가 어떤 방향과 뜻의 표현으로 이해되는 것은 죽음이 언제나 눈 앞에 있고, 이에 따라 실천 속에서 자기 창조의 노력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8월 3일 화요일
너무도 훌륭하게 가공된 지혜가 바로 가장 절묘한 어리석음을 만든다. <프랭클린>
혁명
조지훈
아 그것은 洪水였다.
골목마다 거리마다 터져나오는 喊聲
백성을 暗默 속으로 몰아넣는
<不義한 權力을 打倒하라>
양심과 純情의 밑바닥에서 솟아오른
푸른 샘물이 넘쳐 흐르는
쓰레기를 걸레 쪽을 구더기를 그
罪惡의 구덩이를 씻어내리는
아 그것은 波濤였다.
東大門에서 鐘路로 世宗路로 西大門으로
逆流하는 激情은 바른 民心의 새로운 물길,
피와 눈물의 꽃波濤
東大門에서 大韓門으로 世宗路로 景武臺로
넘쳐흐르는
이것은 義擧 이것은 革命 이것은
안으로 안으로만 닫혔던 憤怒
온 長安이 출렁이는 이 激流 앞에
웃다가 외치다가 울다가 쓰러지다가
끝내 흩어지지 않는 피로 물들인
온 民族의 이름이여
일어선 자여
그것은 海溢이었다.
바위를 물어뜯고 왈칼 넘치는
不退轉의 意志였다. 고귀한 피값이었다.
正義가 이기는 것을 눈 앞에 본 것은
우리 평생 처음이 아니냐
아 눈물겨운 것
그것은 天理였다.
그저 터졌을 뿐 터지지 않을 수
없었을 뿐
愛國이란 이름조차 차라리
붙이기 송구스러운
이 빛나는 波濤여
海溢이여!
*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나? - 1999년 프랑스 대학입시 수학능력고사(바칼로레아) 논술 문제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는 자신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명민함을 요구하는 것인데, 문제는 이 요구가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자신을 알려고 한다지만 스스로 잘못 판단한다거나 자신을 속일 위험이 있지 않을까?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진실을 발견해 내어 이를 표현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만약 이 과정에서 착오가 있고, 이 착오가 나의 허위의 의지와 관련되어 있고, 따라서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만든다면 지혜란 무엇이며,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정소화(夏情小話)
윤오영
내 봄을 사랑함은 꽃을 사랑하는 까닭이요,
겨울을 사랑함은 눈을 사랑하는 까닭이요,
가을을 사랑함은 맑은 바람을 사랑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봄을 사랑하고 꽃을 사랑함은 기실 추운 겨울을 벗어난 기쁨이요,
맑은 바람을 사랑하고 가을을 사랑함은 뜨거운 여름에서 벗어난 기쁨이다.
만일 겨울의 추움과 여름의 뜨거움이 없었다면
봄과 가을이 그처럼 반갑지 못했을 것이다.
여름은 오직 뜨거움 뿐이다.
그 무덥고 훈증하고 찌는 듯 한 여름을 좋아할 사람은 적다.
그래서 여름은 모두 피하려 한다. 피서란 여기서 온 말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여름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여름에 여행을 하고 수석(水石)을 찾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피서를 위해서가 아니요,
휴가를 이용했을 뿐이다.
더우면 더울수록 기쁨으로 참는다.
땀이 철철 흐르고 숨이 턱턱 막히며 풀잎이 바짝바짝 마르고
흙이 쩍쩍 갈라져 홍로(紅爐) 속에 들어앉은 것 같지만,
무던히 즐겁게 참아나가는 것은 한 줄기 소나기[취우(驟雨, 달릴 취)]를
기다리는 마음에서다.
이와 같이 달구어놓고 나야,
먹구름 속에서 천둥 번개가 일고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진다.
그때 상쾌함이란 어디다 견줄 것인가. 금방 폭포 같은 물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뜰이 바다가 되어 은방울이 떳다 흩어졌다 구르는 장관,
그 상쾌함이란 또 어디다 견줄 것인가.
비가 뚝 그친 뒤에 거쳐오는 맑은 바람,
싱싱하게 살아나는 푸른 숲,
씻은 듯 깨끗한 산봉우리,
쏴하고 가지마다 들려오는 매미 소리,
그 청신함이란 가을을 열두 배 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위를 참고 극복하는 즐거움이란
산정(山頂)을 향하여 험준한 계곡을 정복하는 등산가의 즐거움이다.
험준한 산악을 정복하는 쾌감도 좋지만,
소요(逍遙)자적(自適)하는 산책의 취미는 더욱 그윽한 데가 있다.
여름에는 여기에 견줄 만한 즐거움이 또 있으니 석후(夕後)의 납량(納凉)이 그것이다.
하루의 찌는 듯한 더위가 서서히 물러가고
신선한 바람이 황혼을 타고 불어온다.
이때 건건이 발로 베적삼을 풀어헤치고 둥근 미선(尾扇)을 손에 든 채 뜰에 내려 못가에 앉아 솔바람을 쏘인다. 강이 보이는 언덕이면 더욱 좋고, 수양버들이 날리는 방죽, 하향(荷香)이 떠오른 못가, 게다가 동산에서 달이 떠오르면 그 청쾌함이란 또 어떤가.
어렸을 때 본 기억이지만 배고이적삼을 걸친 촌옹(村翁)들이 등꽃이 축축 늘어진 정자나무 밑에서 납량하던 모습이 이제 와선 한 폭의 신선도(神仙圖)같이 떠오른다.
또 귀가(貴家)댁 젊은 여인들이, 잠자리 날개 같은 생초적삼에 물색 고운 갑사치마, 제각기 손에 태극선을 들고 연당(蓮堂)에서 달을 보며 납량하던 모습은 천상(天上)미인도(美人圖)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제 비좁고 복잡한 서울의 거리, 흙내조차 아쉬운 두옥(斗屋)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납량이란 꿈같이 환상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내가 짐을 꾸려가지고 처음 이 돈암동 구석을 찾아온 것은 어느 해 여름철이었다. 콧구멍 같은 집에서 진땀을 흘렸다. 어느 날 밤 늦게 잠이 깨인 나는 우리 집 건너편에 야트막한 동산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내고 가만히 일어서서 대문 밖으로 나갔다. 판잣집이 옹기종기 있는 골목 사이로 아카시아나무 밑을 지나 언덕길로 가면 쉽게 등성에 올라갈 수 있었다.
우선 시원한 바람이 흉금을 상쾌하게 했다. 주위는 말할 수 없이 고요하고, 어둠은 끝없는 바다같이 퍼졌는데 시내의 등불들이 하늘의 뭇 별인 양 아름다웠다. 이렇게 시원하고 아름다운 풍경일 줄은 몰랐다.
"만호등광(萬戶燈光)은 성경경(星耿耿, 빛날 경)이요,
일천모색(一天暮色)은 해망망(海茫茫, 아득할 망)!”
백낙천(白樂天)은 이사가서 오동나무에 걸린 달을 보고 흥에 겨워 집값을 더 주었다지만 나는 이 동산 주인을 찾아가 세전을 얼마나 치루어야 족할 것인가. 나는 이사를 참 잘 왔다고 생각했다. 그 후 이 소구(小邱)는 나의 유일한 납량처가 되었다.
“모옥삼간(茅屋三間)이 치만금(値萬金),
성중(城中)에 자유소산림(自有小山林)!”
이 동산이 이웃에 있음으로 해서, 내 집은 만금이 비고 자부했다. 달밤이면 더욱 아름다웠다. 푸른 잔디가 달빛에 젖고 어른거리는 나무 그림자가 물에 뜬 마름 같고, 호수같이 고인 그 달빛! 정밀(靜謐, 고요할 정, 고요할 밀)이 이 속에 있고, 청허(淸虛)가 이 속에 있었다. 불시(不時)의 청추(淸秋)가 여기 있다.
(후략)
<방망이 깎던 노인, 윤오영, 범우문고 104, 범우사, 2003>
8월 4일 수요일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정의도 불공정하게 되어 버린다. <소포클레스, 엘렉트라에서>
피리를 불면
조지훈
다락에 올라서
피리를 불면
萬里 구름길에
鶴이 운다
이슬에 함초롬
적은 풀잎
달빛도 푸른 채로
산을 넘는데
물 우에 바람이
흐르듯이
내 가슴에 넘치는
차고 흰 구름
다락에 기대어
피리를 불면
꽃비 꽃바람이
눈물에 어리어
바라뵈는 자하산( 紫霞山)
열두 봉두리
싸리나무 새순 뜯는
사슴도 운다.
* 행복은 인간에게 도달 불가능한 것인가? - 1996년 프랑스 대학입시 수학능력고사(바칼로레아) 논술 문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고 말했다. 행복이 이처럼 생의 목표가 된다면 이는 당연히 도달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해야 옳지 않을까?
행복이라고 하지만 역사가 흐를수록 개인적인 행복을 넘어 인류 전체의 행복에 대해 깊은 관심과 논의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 행복인지 딱 잘라 말하기 어렵고 인류 보편의 행복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도 정의내리기 어렵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종훈, 한길사, 1994>
청풍 김씨에 호는 잠곡(潛谷), 육(堉, 기름진 땅 육)이라 하는 명재상이 있었다. 선조 13년에 태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그는 소년 시절에 임진왜란을 겪고 25세에 소과(생원,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여 대과 초시까지 치렀는데, 광해군이 즉위하며 국사가 날로 글러지는 것을 보고는 가평땅 잠곡 청덕동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몸소 밭 갈고 나무장사, 숯장사에 안 하는 일 없이 어렵게 지내는 중에 뜻하지 않은 귀빈의 방문을 받게 된다.
선조대왕의 부마 동양위 신익성이 찾아든 것이다. 명재상이요 문장가인 상촌 신흠의 아들로 그가 부마로 뽑혔을 때는 모두 장래의 영의정감 하나 버렸다고 개탄하였다. 왕의 사위는 의빈(儀賓)이라 하여 벼슬을 못하는 규정이 있던 때문이었다. 과거를 봐도 의당 장원급제할 것을 못하게 만든 것이 미안해 선조 대왕이 꼭 할 장원을 못했으니 장원은 네 손으로 뽑으라고 시관(試官)을 시켜주기까지 하였다는 당대의 인물이다.
[중간생략...]
[임성삼; 두 분이 밭 갈며 잠시 이야기한 후, 막걸리와 돼지고기 한 덩어리로 오래 이야기합니다. 그 때 옆 방에서 아들을 낳자, 동양위는 얼마 전에 낳은 딸과 사돈을 맺자고 제의하였습니다.]
잠곡 김육이 44세 되던 해 인조반정으로 세상이 바로 섰다. 즉시 상경한 그는 이듬해 장원하고, 내외 요직을 두루 거쳐 70세에 우의정, 72세에 영의정까지 올라 효종 9년 79세로 천수를 다하기까지 정성을 다해 국사에 진췌하였다. 국민의 실생활을 중시해 각종 현물로 바치던 세공을 무명과 돈으로 통일하는 대동법을 창안해 실시한 것이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며, 민생의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실학의 실마리를 풀어 학문에도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그가 벼슬이 아직 승지에 있던 회갑 때, 수수한 베 도포에 미투리를 신은 동양위가 통돼지 하나와 막걸리 한 장군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날 하객들은 그것을 받아 먹은 것을 두고두고 생광(生光)으로 여겼다고 전한다.
8월 5일 목요일
세상에 대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바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인슈타인>
고사(古寺) 2
조지훈
목련(木蓮)꽃 향기로운 그늘 아래
물로 씻은 듯이 조약돌 빛나고
흰 옷깃 매무새의 구층탑 위로
파르라니 돌아가는 신라천년(新羅千年)의 꽃구름이여
한나절 조찰히 구르던
여흘 물소리 그치고
비인 골에 은은히 울려 오는 낮종소리
바람도 잠자는 언덕에서 복사꽃잎은
종소리에 새삼 놀라 떨어지노니
무지개빛 햇살 속에
의희한 단청(丹靑)은 말이 없고…
프랑스 대학입시 수학능력고사(바칼로레아) 논술 문제
* 우리가 하고 있는 말에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것만이 담기는가?
말을 하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말에 담긴 내용을 전적으로 통제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말이 상대방에게 야기하는 효과 또한 통제한다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말을 들은 상대방이 우리의 말을 오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의 말이 우리를 배신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점에서 우리의 말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것 이상의, 혹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의 말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즉 우리가 말하려고 했던 것과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생기는 것인가?
* 흔히 옛날 이야기에 원님이 많이 나오는데 원님에도 여러 층이 있다.
관찰사는 도 단위여서 방백이라 하여 종2품으로 격이 높고,
군 단위를 다스리는 것에 수령이라고 대도호부사가 정3품의 당상관이고, 목사가 정3품 당하관[참고; 정 3품에는 당상관과 당하관의 두 계급이 있다],
도호부사(흔히 말하는 부사, 춘향전의 남원부사도 이거다)가 종3품,
군수가 종4품,
현령이 종5품,
현감과 찰방이 종6품직이다.
이렇게 등급이 현격한 것은, 목사가 병사구 사령관 같은 직책을 띠어 그 방면에서 군수, 현감을 거느리기 때문이다. 춘향전에 보아도 운봉현감은 남원부사 아래에서 운봉영장의 직책을 띠고 있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종훈, 한길사, 1994>
[임성삼; 6조의 판서는 정2품이었습니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은 정1품이었고요...]
8월 6일 금요일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에서 배운다. <버나드 쇼>
산방(山房)
조지훈
닫힌 사립에
꽃잎이 떨리노니
구름에 싸인 집이
물소리도 스미노라.
단비 맞고 난초잎은
새삼 치운데
별바른 미닫이를
꿀벌이 스쳐간다.
바위는 제자리에
옴찍 않노니
푸른 이끼 입음이
자랑스러라.
아스럼 흔들리는
소소리 바람
고사리 새순이
도르르 말린다.
*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 1999년 프랑스 대학입시 수학능력고사(바칼로레아) 논술 문제
어떤 철학자도 단순히 훌륭한 이론 체계를 구축하는 즐거움을 위해 철학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든 철학자는 자신의 성찰이 남들에게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과연 철학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철학이란 순수한 성찰이므로 처음부터 실제적 유용성과는 단절된 것이 아닌가?
* “조조는 웃다 망한다.”
“조자룡 헌 창 쓰듯 한다.”
“유현덕모양 울기만 한다.”
“장비 군령(軍令)인가.”
“돈이 제갈(諸葛)량이지.”
“사공명(死孔明)이 주생중달(走生仲達)이라.”
죽은 공명(제갈량, 제갈공명)이 산 중달(사마중달)을 달아나게 했다. 이것을 어떤 선생님이 생(生)의 훈(訓)인 ‘날 생’을 따라 이렇게 가르쳤다.
“죽은 제갈량이가 달아나가다 중달을 낳았다.”
[작가 주; 이것도 틀린 말이다. 역사상의 인물을 말할 때는 ‘이가’라고 않는다. 동네 아이들을 말할 때나 ‘영숙이가’라고 말한다.]
어린 제자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되물었다.
“제갈량이는 남자죠? 죽은 거죠? 그런데 어떻게 중달을 낳아요?”
“이놈! 그러니까 제갈량이지.”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종훈, 한길사, 1994>
8월 9일 월요일
우리에게 내려지는 진정한 축복은
종종 고통, 상실, 그리고 실망의 형태로 나타난다. <조셉 에디슨>
아침
조지훈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 자루도 못다 녹인 채 사라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石榴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宇宙가 열리는 波動
아 여기 太古적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라가 꽃잎을 적신다.
방안 하나 가득 石榴꽃이 물들어 온다.
내가 石榴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 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 - 1998년 프랑스 대학입시 수학능력고사(바칼로레아) 논술 문제
“자신의 과거에서 완전히 단절된 개인”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기 어렵다면, 현재 순간의 한 주체를 정의하는 데 있어 그의 과거가 지니는 중요성을 평가해야만 한다.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일 뿐인가?
모범해답이라 제시된 것의 일부
‘나는 단지 내 과거의 총합이다.’라는 생각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존재는 완전히 미리 결정되어 버린다. 이런 식으로 과거가 현재의 우리를 결정한다는 생각은 과학 법칙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엄격한 인과율의 형태로서 인간의 삶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어 인간은 이러한 결정론에서 벗어나게 되며, 인간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바꿀 수 있는 능력 또한 있다. 임종의 순간에 이르러야만 우리는 완전히 자신의 과거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어땠는지, 따라서 우리의 인생 전체가 어떠했는지를 규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삼국지 연의[작가 주; 연의는 알기 쉽게 풀이했다는 말이다]’에서 밉게 보이도록만 그린 것이 조조이고, 가장 편들어 쓴 것이 관운장이다.
어쩌다 중국 음식점에 가보면 예외 없이 정면에 관운장 초상화가 걸려 있다. 수염 털보와 해사하게 생긴 젊은이가 관운장을 모시고 서있는데, 털보는 그를 신같이 여기고 섬겼던 주창이고, 청년은 그의 아들 관평이다. 중국 사람은 관운장을 높여서 관(關)공(公)이라고 하는데, 그가 그 보기 좋은 수염을 거스르며 들고 보는 책은 ‘좌전’이다.
공자가 그 당시까지 역사를 쓴 것이 춘추인데 대의명분(大義名分)에 서서 바른 시점에서 비판한 때문에 춘추필법이라는 말이 있고, 맹자의 말씀대로 춘추를 지으니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워했다는 책이다. 이것에 일차적인 주석을 가한 것이 ‘좌씨전’, ‘공양전’, ‘곡량전’의 세 종류다. 손에 춘주를 들고 있다는 것은 천하의 공도(公道)에 서 있다는 것을 웅변한다.
중국 친구에게 왜 그리 관공을 숭상하는지 물었다.
“관공은 부득이해 조조에게 가 얹혀 있는 동안 조조에게 무한한 호의를 받았죠. 좋은 말에 50금, 보통 말에 30금, 돈에 의복에 부족한 것이 없었어요. 그런데 유현덕이 있는 곳을 알자 훌쩍 떠났어요. 두 분 형수를 모시고 다섯 관문의 장수를 참하면서[오관참장(五關斬將)]... 그리고 숙소를 나서면서 조조에게서 받은 것을 모두 두고 떠났어요.
욕심이 없는 신, 빌면 하나 먹지 않고 들어만 주는 신이어서 그래 좋아하고 비는 것이지요.”
그들의 순진한 대답을 들으며 속으로 웃었다.
여기서 관공 숭배의 실체를 생각해 본다. 관운장, 제갈량이 활약하던 시절, 중국 중원의 인구는 약 삼천만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 땅에 그뿐이었다니 놀라운 얘기다. 그러한 한편으로는 인구가 적은만큼 이야깃거리는 쉽게 공동의 것이 되었으리라는 짐작도 간다.
여몽의 손에 관우는 싱겁게 최후를 마친다. 그리고 곧 이어 여몽이 헛소리를 하다가 죽는 괴변이 일어났다. (제갈량의 호적수 주유가 전에 죽었다.)
오에서 위나라로 보낸 관우의 목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일대의 간웅이던 조조도 놀라 떨다가 그 빌미로 죽는다.
형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복수군을 편성한 장비가 너무 서두르던 나머지 자기 수하인 범강과 장달의 손에 목이 날아간다.
그런가 하면 유현덕의 간절한 소망도 물거품이 돼 백제성의 패전을 계기로 병들어 불귀의 객이 된다.
이 모두가 관운장의 죽음에 뒤이어 일어난 폭사 사건들이다.
“관운장의 혼령은 무섭다.”
이것이 관운장 신앙의 모체이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종훈, 한길사, 1994>
[임성삼; 다음 사항을 어떤 책에서 보았습니다.
* 청나라 시기의 중국
공자묘는 전국에 3,000개가 있었다.
그러나 관우묘는 30만 개였다.]
8월 10일 화요일
정직한 사람들의 모임을 창설하라.
그러면 도둑들이 모두 가입할 것이다. <알렝>
화려한 달 (華月吟)
양촌 권근
하늘에 화려한 달이 떠 있다
보름이 가까워져 환하게 가득 차네
맑은 빛이 사사롭게 비추지 않고 淸光無私照
만리를 하나같이 밝게 비추네 萬里同一明
* 필자 중학 시절에 조윤제 선생님이 ‘영감’이 무슨 말이냐고 질문하셨다.
“정3품 당상관과 종2품 계급의 사람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그 이상은?”
“대감이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그 아래는?”
“한자로는 진사라 쓰고, ‘나으리’라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늙은이들더로 왜 영감이라고 하지?”
나는 동급생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져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선생은 노인을 우대해서 주는 이름만의 벼슬인 수직(壽職)이라는 것이 있어서, 노인은 누구나 영감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고 설명해주셨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종훈, 한길사, 1994>
* 2009년 7월 25일 열대야의 기준 변경
하루 중 최저 25도 이상인 때가 있으면 열대야 ⇒ 오후 6시 1분에서 다음 날 9시까지 최저 기온 25도 이상인 때가 있으면 열대야로 변경.
가끔 낮에 초저 기온이 생기는 경우가 있으므로 변경하였다.
바뀐 기준에 의하면 최근 10년 동안의 열대야 숫자를 합한 것은 다음과 같다.
서울 80일
부산 125일
광주 109일
제주 255일
[임성삼; 서울의 경우 한 해에 평균 8일의 열대야가 있다. 여름에 서울에서 제주도로 피서를 가면 열대야를 찾아가는 셈이 된다.]
8월 11일 수요일
만나는 사람마다 아는 척을 할 만큼 많은 벗을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의 벗도 없는 것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우연히 읊다
양촌 권근
젊은 시절에는 풍운에 뜻을 두었건만 早歲風雲志
중년에 들면서 수석에 마음을 쏟았네 中年水石心
객지에 홀로 앉아 이를 잡거나
자고 나면 산을 마주하고 시를 읊었네
어느날에야 벼슬 버리고 돌아가려나
오늘 아침에도 술을 얻어 따라 마셨네
취하고 보니 천지가 크기도 해서
활개 펴고 누워서 하루를 보냈네
이를 잡거나; 왕맹이 화음산에 숨어 있었는데, 환온이 관에 들어오자 맹이 베옷을 입고 찾아갔다. 한편으로는 당대의 정사를 이야기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를 잡으며 말했다.
<양촌 권근 시집, 한국의 한시 46, 평민사, 1999>
* 자기 조상이나 섬기는 왕조의 높은 분의 이름을 마구 부르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이것을 가린다는 뜻으로 ‘휘(諱; 꺼릴 휘)한다’고 한다.
“자네 아버지 이름이 뭔가?”
이렇게 물으면 실례일 뿐 아니라, 자신의 무식이 드러난 말투다.
똑같은 이름이라도 어른에게는 함자(銜字)라 하고,
돌아가신 분이라면 휘자(諱字)라 한다.
직접 부르기 거북하여 사육신의 한 분인 ‘이개’의 경우 ‘개라 하는 어른’, 또는 이항복의 경우 ‘항 자 복 자 하는 분’ 등으로 불러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마치 학생의 이름을 부르듯이 ‘이항복이가’ 어쩌고 하면 자신의 낯이 깎이는 어투가 된다. 그래서 이런 분이면 별호를 좇아 ‘백사(白沙) 상공이’ 한다든지 ‘오성이’ 하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종훈, 한길사, 1994>
8월 12일 목요일
친구를 용서하는 것은 적을 용서하는 것보다 어렵다. <윌리엄 블레이크>
황하로 들어가다
양촌 권근
1.
얕은 물에 배가 뜨니 나아가기 어려운데
비가 와서 물 불은 것이라고 뱃사공은 말하네
밀어 옮겨 마침내 황하로 들어가자
한결 빨라져 돛 펼치고 거슬러 올라가네
[임성삼; 그 때도 황하의 지류는 마르는 적이 있었습니다.]
<양촌 권근 시집, 한국의 한시 46, 평민사, 1999>
* 응당 문반(文班), 무반(武班)이어야 하겠는데 무관을 호반(虎班)이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고려의 제 2대 왕인 혜종의 어휘(御諱)가 무(武)자였다. 그래서 그에 대신할 만한 씩씩한 글자를 뽑아보니 호(虎)자가 등장한 것이다.
이건 오히려 약과다. 그 이전 왕조인 신라의 문무왕을 문호왕(文虎王)으로 썼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삼국유사를 읽다 놀란 것은 단군 할아버지를 소개하고 여고동시(與高同時)라고 했는데 ‘고’란 누구일까? 이것은 고려 제 3대 정종의 휘가 요(堯)였으므로 중국 상고시대 요 임금을 이렇게 고쳐 쓴 것이다.
고려 말엽의 대학자 안향(安珦, 옥이름 향)은 조선시대 기록에 보면 모두 안유(安裕, 넉넉할 유)로 나와 있다. 처음 휘를 되찾은 것이라고 자손들은 말하는데, 조선 왕조 문종의 어휘가 ‘珦’인 때문에, 자손들이 거슬러 올라가 고쳐서 부른 것이라고도 한다. 다행히도 조선 역대 왕의 휘는 번번히 새 글자를 만들어 써서,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신경을 안 써도 되게 배려해놓고 있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한길사, 1994>
8월 13일 금요일
항상 빈틈없고 방심하지 않는 사람들 --
그들이 보지 못하는 세세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노만 더글러스>
밀성 영남루 시에 차운하다
권근
백척 높은 다락이 넓은 하늘에 닿아
온갖 풍경이 책상 앞에 펼쳐졌네
시내가 가까워 난간 밖에 물소리 들리고
구름 열리자 산의 푸른 기운이 처마끝에 듣는구나
천 이랑 밭두둑에선 벼가 비를 맞고
십리 마을엔 나무가 연기에 둘렸네
말 한 마리 타고 귀양길에 명승지를 지나다
구경하러 올라서 손님들 모임에 끼어들었네
[임성삼; 평시에는 약간 우울하신 분이나, 귀양길에는 오히려 명랑함이 나타난다. 사람은 이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양촌 권근 시집, 한국의 한시 46, 평민사, 1999>
* 자신의 힘으로 따낸 부인의 칭호를 내명부(內命婦)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상궁이라는 궁인직(宮人職)은 궁중 나인의 우두머리로 정5품의 품계다. 그래서 남자라도 자기보다 계급이 낮은 사람에게는 말을 놓아서 하거나 반말을 했다.
후궁들도 내명부인데, 빈을 봉하면 1품이 되고, 소생이 있으면 무계(無階)라고 하여 초계급이 된다.
외명부에서 가장 높은 칭호가 왕비의 어머니인 OO부부인과 1품 재상의 아내인 정경부인이고, ..., 9품 말직의 부인이 위에 말한 유인(孺人)이다.
그러니까 벼슬을 못해 학생이라 쓴 분의 아내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가장 낮은 것을 꾸어다 쓰는 것으로서, 정확히 말한다면 참례(僭禮; 외람되이 지위에 벗어난 예절)이다.
육조의 판서이면 정2품, 참판(參判)은 종2품, 참의(參議)는 정3품 당상관으로 보하게 되어 있었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한길사, 1994>
* 지금도 고등고시를 거치면 높은 직위에 오르듯이, 과거에 급제 여부에 따라 초사(初仕) 계층에 차가 심했다. 종6품 이상을 참상(參上), 그 아래를 참하라 하여 구분하고, 이 선을 돌파하는 것을 출육(出六)이라고 하여 마치 주사(主事)에서 사무관(事務官)이 되는 것만큼이나 명예로 여겼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한길사, 1994>
8월 16일 월요일
대개 문명은 그 시초에는 성공을 가져왔던
어떤 특성이 점차 지나치게 발전하면서 결국 멸망하게 된다. <르네 듀보>
김해로 옮겨 귀양왔는데 더욱 먼 곳이기는 하나 고을이 크고 백성이 조밀하여 사람들이 모두 이곳으로 온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나도 또한 함육(涵育)의 어진 은혜를 입은 것을 즐겁게 여겨, 스스로 경사롭게 생각하였다.
양촌 권근
김양의 옛절이 맑고 그윽한데
쫓겨난 나그네가 남쪽으로 와 여기 머물었네
조정 떠난 정회를 스스로 잊기 어려웠는데
스님과 만나 웃고 이야기하며 근심을 풀었네
뜰 앞의 푸른 대나무엔 바람 소리 가늘고
창 밖의 푸른 산엔 비 기운이 어렸는데
오늘 서글프게 헤어지고 나면
어느 때야 지팡이 끌고 다시 서로 찾으랴
* 이상은 잡찬(雜簒)이라는 책에 보면 멋대가리 없는 짓을 자그마치 열다섯 가지나 열거하였는데
꽃 사잇길로 벽제(辟除; 하인 시켜 길비키라고 외쳐대는 것)하며 가는 일
이끼 낀 위에다 자리 깔기
꽃나무 아래 잠방이 빨아 넌 꼴
산을 등지고 높이 지은 집(背山起樓)
꽃나무시렁아래 닭이나 오리 키우는 것(花架下養鷄鴨)
꽃을 대해 앉아 차를 마시는 것(對花啜茶)마실철
황윤문 잡찬(雜簒)에도 살풍경이 있다.
음악연주하며 유산하기(鼓樂遊山)
솔밭 사이에 뒷간 지은 것(松間作厠)
명산 좋은 석벽에 시를 쓰는 일(名山壁上題詩)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한길사, 1994>
8월 17일 화요일
성공은 많은 사람들을 파멸시켜 왔다. <벤자민 프랭클린>
정자 위의 서수주의 시에 차운하다
양촌 권근
맑은 시내 위에 정자가 있어
푸른 숲 사이에 술상을 벌였다
술에 취하여 갈 길을 잃자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신선의 산뿐
* 친구 하나가 ‘불역딱호아’하는 문자를 지어서 항용 쓴다. 논어의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락호아”한 것을 차용하여 쓴 것이다.
부인은 교회의 무슨 감투를 썼다든가 노상 집에 아니 계시고,
돈은 떨어졌는데 친구는 찾아오고,
평소 책장이나 넘기며 지냈지 별양 출입을 않는 터이니 외상 그을 데도 없고, 정말 딱한 노릇이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한길사, 1994>
8월 18일 수요일
가장 확신이 없을 때 사람들은 가장 독선적이 된다. <존 갤브레이스>
도은 선생과 헤어지다
양촌 권근
귀양살이 뒤에 서로 만나니 꿈만 같은데
갈림길이 나타나 또 동서로 나뉘네
이제부터 전원으로 돌아갈 계획이나 세웠다가
세월 지나가면 함께 이웃집 늙은이가 되세나
이숭인 李崇仁 1349~1392(충정왕 1~태조 1) 도은
권근 權近/1352~1409
* 제 고향이나 부모님 얘기 자주하는 이엔 나쁜 사람 없다더구만도, 나의 아버지는 농사일로 일생을 지냈지만 여러 모로 유능한 분이셨다. (...)
대목일을 직업으로 하는 친척에게 한 말;
“돌아갈 길에 이 동네 파주댁 안채를 한번 둘러보렴. 그것이 여기서는 제일 오래되어 150년은 실히 될 거다. 기둥을 모두 안으로 우그려 세워놨어. 너 생각하듯이 기둥을 수직으로 세우고, 도리와 중방은 수평으로 얹고, 그러면 반듯하기야 하지. 그렇지만 무거운 힘을 실어 봐. 성냥갑모양 찌부러지지. 기둥을 안으로 기울여 지은 집은 기울래야 기울 길이 없어. 정 헐어서 넘어지게 되면 빙그르 돌아서 주저앉을지언정 그냥 모로 쓰러지는 법은 없는 것이란다.”
(...)
경복궁 근정전에 들어가 둥근 기둥이 줄 지어 서 있는 복판에 섰으면, 목조 건축미의 극치를 느낀다. 기 기둥들이 모두 반듯하게 서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밖에 나와서 돌아가며 자세히 보면 상당히 안으로 기울여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세운 열주는 바깥쪽으로 넘어질 것처럼 기울어져 보인다. 이것을 교정하기 위해 우그려 세운 것이다.
대청 마루에 걸친 대들보는 위로 휘우듬하게 약간이나마 아치형을 이론다. 직선으로 된 보는 배 부분이 처져 보여서 이런 착각을 교정한 것이다. 또 유능한 목수는 벽에서 떨어져 따로 세우는 기둥은 여느 기둥보다 굵게 한다. 그래야 기둥가로 하늘이 내다보여서 가늘게 느껴도 다른 기둥과 같은 굵기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건축에서는 우리의 자랑으로 여기는 이 모두가 잘 실천되어 있다. 그네들의 높은 문명은 그런 데도 꽃 피었던 것이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한길사, 1994>
8월 19일 목요일
변화를 싫어함과 동시에 좋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딜레마이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모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도 더 나아지는 것이다. <시드니 해리스>
이문화 공이 안렴사로 나가는 것을 듣고 전송을 못했으므로 시를 바치니 한번 웃기 바란다
양촌 권근
정원에 춤추는 매화 한 그루
꽃 피면 함께 술 마시기로 약속했었지
어여쁘게 꽃봉오리 활짝 피려는데
공이 가면 그 누가 날 부르러 오랴
군자표변(君子豹變)
열녀전에 이런 기사가 있다. 도당자(陶唐子)가 3년 경영 후 명예는 오르지 못했으나 재산이 세배로 늘어났을 때 그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첩이 듣건대 남산에 현표(玄豹)가 있는데, 안개 속에 숨어 이레를 먹지 않으면 그 털이 윤택해지며 무늬를 이룬다고 합니다. 개나 돼지는 먹는 것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살이 찐 뒤에는 잡혀서 반드시 재앙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표범이라면 우리는 매우 잔인한 동물로 여겨 표변이라는 말을 돌변한다는 뜻으로 쓰고 있으나, 본래의 뜻은 군자가 덕을 닦아 아름다운 문채를 이룬다는 것이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한길사, 1994>
8월 20일 금요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아는 사람의 추천서를 써 주는 일이다. <킨 허바드>
친구의 시골집
양촌 권근
1.
큰 대숲 마을에 어진 사람이 있어 大竹村中里有人
화락하게 형제가 한 이웃에 사네
한 잔 수로 웃고 이야기하는 단란한 자리에
화기가 훈훈해 봄기운 넘쳐 흐르네
2. 봄
야외에 한가롭게 살며 농사꾼의 벗이 되니
비 지나간 들판에 맑은 경치 새로워라
취한 졸음 깨어보니 인적은 고요한데
동산에 도화 이화 활짝 피고 새가 봄을 부르네
3. 여름
비온 뒤 골목에 푸른 이끼 돋았고
솔숲과 대숲엔 더운 기운 가셨네
대낮에 희황상인은 할 일이 없어
취하여 안석에 기대 꾀꼬리 소리 듣네
5. 겨울
들판에 바람소리 높고 눈이 문 앞에 쌓였는데
화로에 둘러앉은 방, 봄같이 따뜻해라
언덕머리에서 사냥 끝내고 늦게 돌아오자
뜰에는 달아맨 원숭이가 있고, 잔엔 술이 가득하네
* 개가 수난을 당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개는 나이를 먹으면 영리한 것이 지나쳐 능글맞은 짓을 하기 때문에 구불삼년(狗不三年)이라 하여 새끼를 몇 배 뽑고는 없애는 것이 상식이다.
전에는 잘량이라고 하여 개가죽이 깔개용으로 또 방한용으로 상당한 몫을 했다.
(개 고기는) 몹시 맵고 얼근하게 조리하는 것이 특색인데, 이 역시 여름철 뚝 떨어진 식욕을 돋우기 위해 생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냄새를 싫어하는 사람을 위하여 쇠고기(경상도 말로는 그냥 육)로 끓여낸 것이 육개장이다. 개장이 본래의 이름이기 때문에 개장을 대신한다고 하여 대구탕(代狗湯)으로도 썼으니까, 대구탕과 육개장은 본래가 같은 음식이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한길사, 1994>
8월 23일 월요일
얼마나 많은 약한 어깨들이 무거운 짐을 간청하고 있는가? <조셉 주베르>
김응하를 애도하다
상촌 신흠
김 장군이여
살아서는 임금 얼굴도 몰랐고
벼슬도 요직에 오르지 못했으나
적군이 왔을 땐 만인의 적수가 되었고
아군이 패해서는 장렬한 장부가 되었다.
..
뼈는 사막에 버려지고 피는 풀을 적셨으니
넋은 무극에 노닐면서 북해를 진압하나니
김 장군은 참다운 장군이라
천고에 성명이 크게 빛나리
아 저 강 원수는
판서의 아들이요 상국의 손자로서
소년에 급제하여 나라의 녹을 먹고
높은 작위에 올라 후한 은혜 입었네
* 일제 때 서울 안국동은 학생의 거리라 불렸다. 휘문, 중앙, 보성, 제1고보(지금의 경기중고등), 제2고보(경복), 경기상업, 중동 등 남학교 외에 경성여고, 배화, 숙명 등 이름있는 여학교들이 근방에 몰려 있었고, 지방 학생들이 학교 가까이 하숙을 하고 있어서 사뭇 학생으로 북적거렸다.
하숙집에서 살살 퍼담은 한사발 밥으로는 이슥토록 공부하는 한창 또래 학생들은 배가 견디질 못한다. 그래 대충 아홉 시경서부터 한밤중 지나도록 간식목판을 받쳐들고 골목골목 외치고 다니는 것이 당시의 풍물이었다. 선배들의 말로는 ‘갈돕회’라는 고학생 모임에서 제작해 거기 등록된 학생들이 팔러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단체의 명칭을 놓고 신경을 곤두세운 것이 일본 경찰이다. 몇몇 머리좋은(?) 경관에게 과제가 내려졌다.
“그 이름의 정체를 밝혀내라.”
한자어가 아닌 순 우리말로 ‘갈바 돕는다(竝助)’는 뜻에서 머리글자만 떼어 맞춘 이 진기한 단어를 놓고 놈들은 머리를 짰다. 우리말로 마름쇠(몽철(蒙鐵))라는, 길에 깔아놓으면 네 개 발의 어느 하나는 언제나 곧추 서서 침입군의 발에 찔리게 된 방어용구가 있다. 남의 것을 잘 떼어먹는 자를 보고 ‘마름쇠를 삼킬 놈’이라고 하는데 사방으로 삐죽삐죽한 이것을 삼킬 정도라면, 아무거나 잘 먹을 것이다. 이것이 프랑스말로 ‘칼톱’인 것을 사전에서 뒤져내고 놈들은 환호하였다.
[임성삼; 영어로는 caltrop, 혹은 caltrap입니다.]
“드디어 알아냈습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여도 곤도서는 독립정신을 표방한 프랑스말입니다.” 그리하여 이 모임의 간부들이 잡혀가 졸경을 쳤다는데, 기록으론 확인을 못했다. 또 프랑스말의 그것이 확실한지 여부도 그 방면 학자들 손으로 밝혀졌으면 한다.
8월 24일 화요일
인간에게는 역경이 필요하다. 건강을 위해서 말이다. <칼 융>
회포를 쓰다
양촌 권근
창밖의 푸른 산이 깎은 듯한데
시름 속에 보니 더욱 또렷하네
가을 바람 날마다 모자와 지팡이에 불어
높은 산에 올라가 서울을 바라보게 하네
* 예전 서울의 내외주점(內外酒店)은 여자가 영업을 하건만 남자 손님과 대면을 않을 뿐더러, 술청이라는 데가 대문간 땅바닥이라 꼭 가마 메고 왔다가 얻어먹는 것 같은 꼴이었다.
대문에 거위병(고장에 따라서는 두루미)이라는 사기 병을 그려 붙인 것이 간판이다. 병을 들고 가 사오기도 하는데, 가서 먹으려면 대문을 밀고 들어가 좌판(얕은 상) 양쪽으로 놓인 트레방석에 쭈그려뜨리고 앉는다. 상에는 김치 같은 거저 먹는 안주가 뚜껑 덮어 놓여 있고, 필통엔 댓가지 젓가락이 몇 벌 꽂혀 있을 뿐이다. 술을 청하면 중문이 바시시 열리며 쟁반에 주전자와 잔을 놓아 팔뚝이 쑤욱 나온다. 그래서 옛날 자기 은인을 찾기 위해 차렸다는 팔뚝집 얘기가 그럴 듯하게 전해내려 온다.
철을 따라 겨울이면 녹두부침, 봄이면 탕평채(청포에 숙주나물, 물쑥, 김을 섞고 고기를 다져넣어 초간장으로 무침) 같은, 그 집의 특색있는 안주가 대개는 한 가지만이 마련돼 있어서, 청하면 그것도 소리없이 쑤욱 나온다.
술값을 묻는 법없이 상 위에 내어놓고 인사도 않고 대문을 나선다. 그러니까 거기 오래 앉아 수다를 떨 수도 없어 퇴근길의 석양배 한잔 하기엔 십상이다.
8월 25일 수요일
큰일에 부도덕하게 될수록 작은 일에는 더욱 금욕적이 된다. <플로렌스 킹>
[임성삼; 참고로 히틀러는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거의 먹지 않았으며, 옷도 군복 두세벌이 모두였다고 합니다.]
우후(雨後)
상촌 신흠
비 그치니 정대가 고요하고
바람 부니 잠자리가 서늘하구나
시든 꽃엔 철늦은 고움이 남았고
빽빽한 숲엔 새로운 향기 풍기네
맑은 꿈은 강마을로 달려간다. 淸夢落江村
* 어떤 분이 수창동(지금의 내수동) 골목에서 한잔 걸치고 야주개(夜照峴; 현 광화문에서 경희궁으로 뚫린 길, 옛날 홍화문 현판이 어찌나 명필이었던지, 밤이면 거기서 빛이 훤하게 비쳤대서 생긴 이름이다. 군대 해산 때 쌍방이 교전하는 총알을 맞고부터는 그 기운이 영영 사라졌다고 한다) 큰길로 나섰는데, 군밤 생각이 나 거리의 군밤장수에게 다가갔다. 군밤장수는 무슨 책인지 켜켜이 쌓아놓고, 윗권 맨 윗장부터 부욱 뜯어서는 10전어치 20전어치 싸주고 있지 않은가?
학자 눈엔 책만 보인다(미안합니다)고, 그 책을 집어 가로등에 비춰보니 필사본인데 실학에 관계된 처음 보는 내용이다. 붓으로 베꼈으니 자칫 유일본이겠는데.... 그만 술기운이 버쩍 깨며 주머니를 뒤졌다. 얼마인지는 모르나 지갑을 탁탁 털어서 그것과 맞바꾼 신사는, 그 책을 새끼줄로 멜빵 걸머지고 종로 큰 길을 활보해 자택으로 돌아왔다. 찬물로 머리를 감고 커피를 진하게 달여서 마시고, 등불 아래 앉아 자세히 보니 이런 변이 있나? 세상에도 진귀한 실학 관계의 저술이다.
정조때 4검서(檢書;이서구, 유득공, 이덕무(李德懋 1741∼1793(영조 17∼정조 17)), 박제가 등 임금의 총애를 받던 문신들) 중의 한 분이던 이덕무의 손자로 이규경이란 분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 60권의 저자 초고본이다.
이리하여 첫머리 몇 권인지가 뜯겨져 나간 이 책은, 당대의 장서가인 육당 최남선의 서고로 들어갔는데, 육당다운 배려로 서사들을 시켜 한 벌을 베껴놨더니 원본은 13만 권이나 되는 장서에 끼어 사변통에 타 없어졌다.
용하게도 등사본이 살아남아 동국문화사에서 영인본으로 나왔는데, 애당초 베낄 적에 잘못 옮긴 것이 많아 가치가 반이나 떨어졌다고 그 방면 선배들은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사변중 서울을 비우고 남하한 사이 서적만을 전문으로 털어다 판 얌체도 있었고, 우리 책은 종이 질이 좋아 제지공장으로 몰아갔는데, 창고에 들어가 몇 권을 들춰내 그것을 주석내어 박사학위를 딴 운수좋은 사나이도 있다.
*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의 백과사전식 저서. 한국·중국 및 기타 외국의 고금사물에 대해 1400여 항목에 걸쳐 고증하였다. 천문·역법(曆法)·수리·시령·종족·역사·지리·경제·문학·문자·음운·금석·고기(古器)·전적(典籍)·서학(西學)·서교(西敎)·도교·불교·서화(書畵)·의약·음양오행·술수(術數)·상서(祥瑞)·재이(災異)·제도·습속·예제(禮制)·복식·유희·주거(舟車)·교량·야금(冶金)·도요(陶窯)·병학(兵學)·무기·기구·양전(量田)·양조(釀造)·종축(種畜)·외래물종·초목·어충(魚蟲)·조수(鳥獸)·광물·금속 및 전고(典故)에 이르기까지 의심나는 것이나 고증이 필요한 것을 고정변증(考訂辨證)한 것이다. 그리고 부록으로 오주서종(五洲書種)·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오주서종박물고변이국(五洲書種博物考辨二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가 쓴 서문에 제작동기가 밝혀져 있다. 이 책은 저자가 평생 벼슬하지 않고 수시·수처에서 생각나고 쓰이는 대로 모아 정리한 대작으로서 경학(經學)·사학(史學)·문학·자연과학 등 다방면에 걸쳐 서술되어 관계분야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1959년 동국문화사에서 상·하 2책으로 영인, 간행하고 부록으로 <오주서종>을 수록했고,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도 국역, 간행했다. 60권 60책. 필사본. 규장각도서
[브리태니커]내용에 있어서도 일부 잘못된 서술이나 세상에 유전되는 이야기가 그대로 실린 것이 있다. 그러나 개인의 저술로는 기념비적인 방대한 저술이며, 이 책의 저변에 깔린 사상사적 의미는 더욱 중요한 저술이라고 하겠다. 원본은 최남선(崔南善)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6·25전쟁 때 없어지고, 이를 필사한 것만 규장각에 남아 있다. 애초에 원본도 권1·2는 유실된 상태였으며, 필사본도 손실이 있어 권1~4가 없고 현재는 56권만 남아 있다. 〈오주서종〉 등은 8·15해방 후에 따로 발견되었다. 1959년에 고전간행회에서 이를 영인했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한길사, 1994>
8월 26일 목요일
부자 친구일수록 당신에게 더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한다. <엘리자베스 마버리>
구월 구일 청음에 주다
<상촌(象村)집, 신흠(申欽 1566~1628(명종 21~인조 6))>
깊은 시름 속에 아름다운 계절을 만나
어려운 먼 길 떠나는 이를 보내노니
노란 국화 사람 뜻을 안 듯하고黃花如解意
흰 막걸리 또한 다정하구려白酒亦多情
* 당시 선술집 풍경은 이러하다. 서울의 꺾어지은 중류 주책 앞 마당에 덧지붕을 얹어 덮고, 대청 옆 건넌방 앞 뒷마루 위치에 술청을 차린다. 주인이 건넌방 쌍바라지를 등지고 앉은 앞에는 불을 때 물이 설설 끓는 가마솥이 있고, 그 위를 가로로 걸친 기둥과 기둥 사이가 목로(木爐)다. 앞을 막은 안쪽 가마솥 좌우로는 땅바닥 깊이 술독을 묻고, 층으로 맨 선반에는 몇 종류의 술잔이 정돈되어 있다.
목로2(木壚)[몽노] 㰃?주로 선술집에서 술잔을 놓기 위하여 쓰는, 널빤지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 ≒술청‧주로06(酒壚). ¶저쪽 목로에도 술손님이 한 패 앉아 있었다.≪송기숙, 녹두 장군≫
삼삼오오 손님들이 다가와 주문을 한다. 철원주, 광릉술 등 산지 이름을 딴 약주에 막걸리, 소주 등 취향에 따라 요구하면, 주인은 술에 걸맞는 술잔을 더운 물에 둘러내서 좌판 위에 놓는다. 행주질은 않고, 잔에 온기가 있어서 술맛에 영향을 안 주어서 좋다.
양푼이라는, 놋쇠로 만든 그릇은 굽이 없어 밑바닥이 그냥 번질번질하다. 그래서 뻔뻔한 사람더러 ‘양푼 밑바닥 같다’느니 ‘양푼 밑바닥은 마치 자국이나 있지’하고 비아냥거린다. 이것은 상에 놓는 그릇이 아니요, 식품을 담아 더운물에 중탕해 데워내는 소용이기 때문에 굽이 있으면 오히려 불편해서 그리 만들었다.
주인은 손님이 요구하는 술을 꼭 먹을 만큼(석 잔이면 딱 석 잔만) 양푼에 떠 담아서 더운물 위로 선유(船遊)하듯 한두 바퀴 두른다. 그때 손끝을 담가 가늠해서 딱 먹기 좋을 만큼 데워졌을 때 국자로 떠서 잔에 붓는다. 술 한 잔에 안주 한 가지 끼워서 5전씩이나, 석 잔씩 먹었으면 석 점의 안주를, 꼭 요새 뷔페 식당처럼 푸짐하게 늘어놓은 중에서 골라 굽거나 익히도록 심부름꾼에게 준다. 꼭 알맞게 데운 술을 홀짝 마시고 나면 금방 익힌 따끈한 안주를 집게 돼 있어 여기 맛들인 사람은 인이 박히다시피한다.
석양배를 즐기려 손님이 북적북적할 때면 안주를 더 굽지나 않나 술잔 수가 틀리지나 않나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도 용하게도 꼭꼭 계산을 맞추는데, 이는 술을 붓는 이 앞에는 빈 그릇이 몇 개 놓이고 여러 가지 콩이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키 크고 얼굴 시커먼 일행에게 여섯 잔 부었으면 검고 큰 콩이 여섯 개, 하얗고 조그마한 사람 일행이면 하얗고 잘디잔 길금태(콩나물콩), 얼굴이 벌건 손님이면 대추콩, 곰보 손님이면 얼룩콩 이렇게 술 부은 숫자만큼 콩을 놓는 것이다.
주량이 커서 안주 없이 여러 잔 먹고 싶으면 사발잔으로 하나씩인데 이것은 곱절씩 든대서 ‘곱배기’다. 곱빼기에 대해 분량은 적어도 좋으니 맛있게 뽑아달라 한대서 ‘맛배기’라 하는 것은 요사이 나온 말이다.
밤을 새웠거나 전날 과음한 사람이 아침 일찍이 술국 곁들여 먹으러 왔으면 그때는 해장술이다.
곡주를 담그던 시절, 양조장에서 나오는 지게미(흔히 ‘재강’이라고 한다)를 받아다 배추 줄거리 등을 넣어서 부글부글 끓인 식품이다. 온돌을 뜯어 고친다거나 장작을 패는 자유 노동자들이 그것으로 아침 요기를 했다. 술 기운이 있어서 몸이 훈훈해 어한(禦寒)도 되고... 그래서 술 중독이 되어 청탁을 불문하고 마시는 이를 ‘모주’ 또는 ‘모주꾼’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인목대비의 어머니가 제주에 귀양살이 할 때 생계를 이을 길이 없어 서울 대갓집식으로 술을 담가 팔았더니 일부러 멀리서 온 손들이 자꾸 조르는 바람에 막 걸러 판 것이 ‘막걸리’, 그래도 자꾸 밀려와서 지게미를 울궈 줬대서 모주(母酒)라고 한다는 그럴 듯한 설명이 따른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한길사, 1994>
8월 27일 금요일
학식이 있는 바보는 무지한 바보보다 더 어리석다. <몰리에르>
우연히 흥이 나다 1553년, 17 세
이이(李珥, 귀엣고리 이, 귀고리, 날밑, 햇무리)
솔숲 아래로 걸어가서
술 항아리 열었더니 솔내가 퍼지네. 開樽空翠來 술통 준, 물총새 취
기러기 날아가는 산봉우리에 비가 어둡게 내리고
시냇물은 바위를 씻으며 흐르네
<율곡 이이 시선, 한국의 한시 26, 2000>
* 개성의 명물로 ‘앉침 술집’이란 것이 있었다. 쉽게 말하면 아마추어 술집이다. 따로 간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는 사람끼리나 찾아와서 마시는, 그리고 남편이 외방 장사 나간 사이에 주부가 부업 삼아서 하는 술집이다. 그러므로 손님이 두 패 세 패씩 드는 것도 아니고 북적북적하는 것도 아니다. 금은방을 하거나 포목점을 하던 장사치 일가 친척의 누군가가 잠깐 손님을 대접하려고 모시고 가는 사교장이다. 가정집이다 보니 서먹서먹하기도 하고 손님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조심이 된다. 그러고서야 무슨 술맛이 나겠느냐고 하겠지만 그런 가운데 그래도 그윽한 운치도 있다.
“안녕하세요? 손님 두 분 모시고 왔소이다.”
“아이고, 어서 오셔요. 이 방으로 드시죠.”
들어앉아 조금 기다리면 상이 들어온다. 차린 거라곤 보쌈김치와 소주뿐이다. 물론 김치는 한 사람 앞에 한 보시기씩 따로따로 담겨 있다. 우선 인사 삼아 한 잔씩 하면서 김치를 헤쳐 안의 것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노라면, 쇠고기 편육과 제육을 한 접시씩 들여온다. 삶아서 치룽에 담아 천연 냉장고인 우물에 채워놓았던 것을 필요한 만큼 잘라서 끓는 물에 중탕해 다시 솜씨있게 종잇장처럼 얇게 썬 것이다.
고기는 야채와 섞바꿔 먹어야 맛이 있는 법이요, 그 중에도 제육은 김치에 싸서 먹어야 제맛이 난다. 비로소 술잔이 돌고 안주가 줄어들고 그러노라면, 기름에 부쳐서 이 역시 채워놓았던 전유어를 따뜻하게 기름에 다시 지져서 한 접시 내오고는 먼저 것을 싹 거둬 들어간다.
주인의 솜씨를 칭찬하며 다시 한 잔씩 하노라면 이번에는 거둬 들여간 걸로 매운탕을 끓여서 내온다. 물론 형편따라 다른 것을 보태기도 하겠지만 그 손님이 남긴 김치와 편육, 제육이 주재료가 된다. 얼큰한 것이 생각나던 참이라 이 김치찌개는 대단한 인기로 환영을 받는다. 물론 부침개를 같이 넣어 먹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에 안에서는 밤을 까서 솜씨있게 생률(生栗)을 친다. 생률은 날밤이라는 뜻이지만 생률을 친다는 것은 일정한 모양으로 예쁘게 깎는 것을 말한다. 매운탕도 동이 날 무렵 생률이 한 접시 들어오면 한 코스가 끝난다. 밤은 입맛이 개운해 좋기도 하지만 대개는 손님을 보내고 다시 전방에 나아가 앉아 장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입에서 술내가 나지 않게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마냥 그냥 눌러앉아 더 먹겠다고 다시 술과 음식을 청하면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된다. 물론 계절에 따라 변동이 있어 봄, 여름이면 쌈김치 대신 얼갈이 겉절이가 나온다거나 파강회, 미나리강회로 솜씨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값을 묻는 법이 없는 일이다. 물어보아도 대답은 “처분껏 하십쇼.”이다.
그리하여 해방 전 값으로 3원이면 되는 것을 5원 주면 고맙고, 2원을 줘도 그만이다. 다만 박하게 주면 다음에 갔을 때 “오늘은 영업 안 합니다”하고 문전에서 따돌려버리고 받지 않는다.
개성의 ‘앉침 술집’은 중국 방식의 장점을 따서 우리 실정에 맞게 옮겨온 것이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한길사, 1994>
8월 30일 월요일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또한 자신을 숨기는 수단이 된다. <니체>
동문을 나서면서 出東門 (1554, 18 세)
이이
하늘과 땅은 누가 열었으며
해와 달은 누가 갈고 씻었던가,
산과 강물은 이미 얽혀졌고(融結; 녹아 붙음)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찾아드네.
우리 인간이 만물에 처해
그 지식 가장 으뜸가는데,知識最爲巨
어찌 한 곳에만 매달인 조롱박처럼 되어
쓸쓸하게 한 처소에서 헤매이랴
팔방과 구주 사이에八荒九州間
어디가 마음껏 놀지 못하랴.優遊何所저 차
이 봄 산 천 밀 밖으로春山千里外
지팡이 짚고 나 장차 떠나리.策杖吾將去
그 누가 나를 따를는지
저녁 어스름에 부질없이 서서 기다리네.
* 어머니의 3년 상을 마친 뒤에, 금강산으로 떠나면서 지은 시.
논어 양화편; 내 어찌 조롱박이랴, 한 곳에만 매여서...
<율곡 이이 시선, 한국의 한시 26, 2000>
이이: 1536(중종 31)-1584(선조 17). 13 세에 진사 초시 합격, 생원시와 식년 문과에 장원, 이조판서와 종 1 품 판돈령 부사.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남.
* 점잖은 가정에서 어른이 상을 받으시면 아들 며느리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모셔 서서 지켜보는 법이요, 이것을 ‘시반(侍飯) 선다’ 또는 ‘수반(數飯, [임성삼; 數가 아니라 隨?])한다’고 한다.
어떤 며느리가 시집온 지 사흘 만에 처음 부엌에 내려 시아버지 진짓상을 보아다 놓고 모처럼 시반을 섰으니 시아버지 마음엔들 얼마나 대견하였으랴만, 첫 숟갈에 “딱”하고 돌멩이를 깨물었다.
“얘, 아가!”
불안해 죽겠는데 부르시니 대답 안 할 수도 없고, 간신히 목구멍에서 기어나오는 목소리로
“네?”
하였더니, 시아버지 한다는 소리가
“이 다음엘랑은 식성대로 섞어 먹게 따로따로 놔라.”
“!”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한길사, 1994>
8월 31일 화요일
진실은 종종 반대자들의 주장이 아닌
옹호자들의 열정에 의해서 더 해를 입는다. <윌리엄 펜>
월영대에서
퇴계 이황
늙은 나무 기이한 바위
푸른 바닷가에 있건만,
고운(孤雲) 선생 놀던 자취
연기처럼 스러졌네.
지금은 오직 높다란 대에
밝은 달만 길이 남아,
그 정신 남겨다가(留得精神 向我傳)
내게 전해주네.
* 월영대; 고운 최치원이 즐기던 정자로 당시 창원부 회원현 서쪽 바닷가에 있었다.
<퇴계 이황 시선, 한국의 한시 6, 평민사, 2001>
* 무심코 주고받는 대화에도 묘한 것이 많다.
‘장가를 든다?’ 색시가 시집으로 들어오는데 신랑이 어디로 ‘들며’, 장가를 ‘간다’니 어디로 간다는 얘긴가?
돈 주고 쌀을 사오면서 쌀 ‘팔아온다’고 하는 등등...
더욱 묘한 것은 ‘술 받는다’는 말이다. 술을 ‘받는다니’ 도대체 무슨 소린가?
내 어려서 동네 극빈자의 잔치하는 것을 본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도 여전히 차일은 치고, 마당에는 멍석을 연립해 깔았는데 갓 쓰고 두루마기 입은 노인들이 차례대로 주욱 늘어 앉았고, 개다리 소반에다 콩나물을 삶아 무쳐서 수북이 담은 대접이 하나, 젓가락 한매에 막사시 사발이 하나, 이것이 전부다. 일 보는 젊은이가 맨 상석 노인 앞에 그 소반을 가져다놓고 부우연 막걸리를 한 식기 차랑차랑하게 떠 부으면 노인은 콩나물 한 젓갈 집어 우물우물하다가 술 그릇을 들어서 쭈욱 꿀꺽꿀꺽, 그리곤 다시 콩나물 한 젓갈. 그러면 그 상은 다음 좌석으로 옮겨간다. 이렇게 두 바퀴 돌았다면 그 사람 형편에 잘 차린 잔치다. 이런 때 약주를 못 자시는 분이 있으면 ‘짓는다’고 하여, 반 또는 그 이상을 본디 술 그릇에 도로 붓게 하고, 아주 조금을 그래도 축하하는 뜻에서 맛있는 듯이 든다. 때론 술에 주린 이가 있어서,
“받아서 날 주지 그랬어?”
하고 투정하는 것도 보았다. 그러니 술이고 음식상이고 자기 앞으로 ‘받는’ 것이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한길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