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월 15 일 화요일의 산책

젊음의 신, 봄, 기쁨의 사람, 모든 시인의 임금이신 시인(詩人). 《K. 지브란/사람의 아들 예수》

4 월 30 일 화요일의 산책

남을 위해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어서 누구나 잘 하고 있다. 이 기회에 나는 여러분에게 자기 자신을 위해 살도록 요청한다. <에머슨>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홍낭 洪娘》

[임성삼; 포근한 봄비가 오고 있습니다.]

대학을 객관화하면 교수라는 이름의 그룹과 학생이란 이름의 군상(群像)이 일정 기간 같이 지내 보는 건물의 이름일 따름이다. 그러니 대학이 그냥 그대로 어떤 가치를 생산하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어떤 가치를 전달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학생 개개인이 자력(自力)으로 가치를 발굴해야 하는 광산과 같은 것이다. 요는 대학에 기대할 것이 아니라 대학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이병주 李炳注/대학생(大學生)이 된다면》

4 월 29 일 월요일의 산책

우리들은 감탄과 희망과 사랑으로 산다. <워즈워드>

강호(江湖)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탁료(濁冗) 계변(溪邊)에 금린어(錦鱗魚) 안주로다

이 몸이 한가하옴도 역군은(亦君恩)이셨다. 《맹사성 孟思誠》

내가 세상 눈에 어떻게 비쳐져 있는지 모르지만 나 자신으로는 해변가에서 놀고 있는 소년과 같은 느낌이다. 이따금 매끄러운 돌이나 유난히 예쁜 조개 껍데기 같은 것을 주워 가면서 기분전환을 하지만 진리의 대양은 아무것도 발견됨이 없이 눈앞에 유유하다. 《I. 뉴턴》

4 월 26 일 금요일의 산책

마음의 통일(일심, 一心) 없이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원효>

강호에 봄이 드니 이몸이 일이 하다

나는 그물 깁고 아이는 밭을 가니

뒷뫼에 엄긴 약(藥)을 언제 캐려 하느니. 《황희 黃喜》

돌에도 피가 돈다. 나는 그것을 토함산 석굴암에서 분명히 보았다. 양공(良工)의 솜씨로 다듬어 낸 그 우람한 석상의 위용은 살아 있는 법열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인공이 아니라 숨결과 핏줄이 통하는 신라의 이상적 인간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이 신라인의 꿈속에 살아 있던 밝고 고요하고 위엄이 있고 너그러운 모습에 숨결과 핏줄이 통하게 한 것이 불상을 조성한 희대의 예술가의 드높은 호흡과 경주된 심혈이었다. 그의 마음 위에 빛이 되어 떠오른 이상인의 모습을 모델로 삼아 거대한 화강석괴(花岡石塊)를 붙안고 밤낮을 헤아림 없이 쪼아 내고 깎아 낸 끝에 탄생된 이 불상은 벌써 인도인의 사상도 모습도 아닌 신라의 꿈과 솜씨였다. 《조지훈 趙芝薰/영원(永遠)과 고독(孤獨)을 위한 단상(斷想)》

4 월 25 일 목요일의 산책

나는 영국인이다. 라틴어나 그리스어를 못해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처칠>

그리스의 섬들, 그리스의 섬들

사포가 불타듯 사랑하고 노래한

전쟁과 평화의 기술이 자란

델로스가 일어나고 피버스(해의 신)가 솟아올랐던 그리스의 섬들. 《G.G.바이런/돈 후안》

만약 아름다운 눈썹 밑에 눈물이 괴어 넘치려 하거든 그것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굳센 용기를 갖고 견뎌라. 걸어가는 길이 어느 곳은 높아지고 어느 곳은 낮아져서 올바른 길의 분별이 어려운 이 세상에서 너의 여로가 굳건한 걸음이 못 되더라도 덕의 역량은 언제나 올바른 방향으로 너를 전진시킬 것이다. 언제나 행위의 동기만을 중요시하여 귀착되는 결과를 생각하지 말라. 보수에의 기대를 행위의 결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 《L.베토벤》

4 월 24 일 수요일의 산책

뜻을 세우고 명확히 알며 독실(篤實)하게 행하라. <율곡 이이>

[임성삼; 위의 세 가지를 행하면 세상을 사는데 어려움이 없게 됩니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이장희 李章熙/봄은 고양이로다》

[임성삼; 아래는 우리 나라에서 과거를 보던 절차입니다.]

이조(吏曹)에서는 과거 보일 때 시험관으로 합당한 사람들의 명단을 임금에게 올리면 임금은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낙점한다. 그렇게 임명된 시험관들이 임금의 명령을 받고 시험 보는 장소로 간다.

그날 새벽 삼관[승무원, 성균관, 교서관]에서 응시자를 모아놓고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서 극위[외부와 연락을 허락하지 않고 응시자들만 있게 하는 처소]로 들여보내는데 그때 수협관[응시자의 신체와 소지품을 수색하는 임시적 직책]이 문밖에 나누어 섰다가 의복과 상자를 수색한다. 만약 어떤 글발을 가지고 들어가다가 발각되면 순작관[시험장소를 순찰하는 직책]에게 인도하여 결박을 지을 뿐아니라 시험작 밖이면 한 식년[3 년]만 응시자격을 박탈하고 시험장안이면 두 식년이나 박탈하는 법이다.

해가 돋기 전에 시험관이 대청에 나와서 초불을 켜고 앉아있는 것은 바라보기에 마치 신선이 앉은 것 같다. 삼관에서 뜰에 들어서서 응시자들의 좌석을 정돈시킨 다음 다시 나간다.

해가 환해진 후 제목을 써서 내걸고 점심나절에 시험지를 거두어들이어 인을 쳐서 다시 삼관에 내준다. ....

해가 기울면 북을 쳐서 재촉하고 글이 다 완성되면 수권관[시험지를 거두어들이는 직책]에게 제출한다. 그 글은 등록관[시험관이 글씨를 보고 응시자가 누구인가를 알아내지 못하도록 전체 시험답안을 다시 베끼는데 그 사무의 책임자]이 가져다가 두 끝에 동일한 번호를 매기고 또 감합[딴 폭의 서류를 이어서 한 도장을 찍거나 한 글자를 써서 다음에 다시 맞출 수 있는 증거로 삼는 것]을 써서 두폭에 쪼개니 한 폭은 응시자의 이름을 밀봉한 것이오, 다른 한 폭은 응시자가 지은 글이다.

봉미관[응시자의 이름이 밀봉되어 있는데 그 비밀을 보장하기 위한 직책]은 이름을 밀봉한 폭만 받아가지고 딴 곳으로 가고 등록관은 글씨 쓰는 사람을 모아 붉은 먹으로 전체를 베끼어낸다. 그다음 사동관[베낄 때 착오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다시 한 번 교열을 행하는 데 그때 원문을 읽는 직책]은 원본을 읽고 지동관[사동관이 읽는 원문을 들으면서 베끼어낸 글을 교열하는 직책]은 붉은 먹으로 베낀 것을 교열해서 시험관에게로 넘긴다. 시험관이 꼲아서 등급을 매긴 후라야 봉미관이 밀봉한 이름을 뜯어서 방을 쓰는 것이다.

중국 고전을 강받는 법은 같은 번호를 둘씩 싸서 사서, 오경에도 죽 붙이고 또 통에도 넣는다. 응시자가 자기의 강 바치고 싶은 책 이름을 써서 내놓으면 시험관이 통에 든 번호를 뽑는다. 만약에 <천(天)[조선에서는 천자문의 글자 순서를 취해 사용했다]>자 번호를 뽑았다면 그 책에 <천(天)>자 번호 붙은 곳을 펼치어 놓고 그 대문만을 골라서 응시자에게 준다. 응시자는 그 대문을 읽으면서 해석하고 시험관은 주와 전주까지 들어서 질문한다. 서리가 통, 략, 추, 불의 넉자를 써서 시험관들 앞에 놓는데 그것을 강첨[채점표]이라고 한다. 한 책을 다 강하고 날 때마다 서리가 없어진 강첨만큼 아래 있던 것을 위로 올려놓는다. 시험관이 차례로 강첨을 검사하여 제일 많은 수로 채점하는 데 서로 동수가 될 때는 낮은 쪽을 좇는다. 초장[한 회의 시험을 3 장으로 나누어 세 번 각기 다른 것을 시험본다]의 고전을 강 받은 점수와 중장, 종장의 글 지은 점수를 함께 계산한다.

이렇게 뽑는 것도 한 사람의 마음으로 되지 않고 꼲는 것도 한 사람의 손으로 되지 않으니 우리 나라에서 공정한 일로는 오직 과거가 있을 뿐이다.

<성현의 용재총화; 과거보는 절차>

4 월 23 일 화요일의 산책

당신을 곤경에 빠뜨린 바로 그것이 또한 당신을 곤경에서 구해주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박힌 가시는 가시로 빼내고, 땅으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서지 않는가? <이드리스 샤흐>

그렇다 비둘기……

너도 나도 가슴에선 하얀 비둘기

푸륵푸륵 가슴에서 비둘기를 날리자,

꾸룩, 구, 구, 구 꾸룩！

너도 나도 어깨 위엔 비둘기를 앉히자.

힘있게, 따뜻하게. 《박두진 朴斗鎭/시인공화국 詩人共和國》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대는 당장 그 사람을 해석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그에 관한 관념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 관념은 그대의 이미지이다. 그 사람은 중요하지 않고, 오직 그대의 관념만 존재할 따름이다. 그 사람은 멀리 가 버린다. 관념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인간은 잊혀진다. 그러면 그대는 그 관념과 더불어 살게 된다. 어떤 사람과 얘기를 할 때 그대는 정말로 그 인간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서 그대가 만들어 놓은 관념과 얘기하는 셈이다. 《B.S.라즈니시/마음으로 가는 길》

4 월 22 일 월요일의 산책

겉으로 보기에 삶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모순 뒤에 숨어있는 질서를 발견할 때 비로소 삶은 참으로 아름다워진다. <이드리스 샤흐>

길

박이문

길은 부름이다. 길이란 언어는 부름을 뜻한다. 언덕 너머 마을이 산길로 나를 부른다. 가로수로 그늘진 신작로가 도시로 나를 부른다. 기적 소리가 저녁 하늘을 흔드는 나루터에서, 혹은 시골 역에서 나는 이국의 부름을 듣는다. 그래서, 길의 부름은 희망이기도 하며, 기다림이기도 하다. ...

화초로 잘 꾸며진 정원 길에서 삶의 재미를 느끼며, 시골 샘터로 가는 들꽃 무리진 길에서 소박하나 알뜰하고 따뜻함을 감각한다. 산과 들을 일직선으로 뚫은 고속도로에서 인간의 승리감을 느낀다면, 들로, 산골짜기로 꼬부라지는 철로에서 삶의 끈기를 맛본다. 봄꽃 필 무렵, 산을 넘는 길은 마치 미소와도 같이 밝다. ...

두꺼운 돌을 깔아 만든 넓은 로마 제국의 길은 세계 정복의 힘의 자국을 내고 있는가 하면, 설악산 암자로 올라가는 좁은 길은 세상을 떠나 명상에 잠기려는 마음씨의 자국이다. 이미 잡초에 파묻혀 버린 오솔길에서 삶의 무사함을 볼 수 있는가 하면, 험한 산의 절벽을 따라 새로 난 길은 삶의 의욕을 상징한다. 높은 돌 층계를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디디고 올라가면서 우리는 삶의 어려움에 새삼 젖는가 하면, 눈 덮인 들길을 헤쳐가면서 우리는 고독한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어떤 길은 꿈이 배어 있고, 어떤 길은 사색적이고, 어떤 길은 황량하고, 어떤 길은 쾌활하다. 길은 인간의 꿈, 생각, 의지, 느낌을 통틀어 함께 반영한다. 길은 삶이 남기는 삶에 대한 인간의 문학적 기술이다. 인간에 의해 씌어진 이 길이라는 언어에 의해 자연은 침묵을 깨뜨리고 의미를 가지게 되며, 문화라는 꽃을 피우게 된다. 자연의, 아니 우주의 고독이 노래나 시로 바뀐다.

한 사회에 따라, 한 문화에 따라, 그리고 한 시대에 따라 길은 애절한 노래일 수도 있고, 길이라는 시는 서정시가 될 수도 있고, 서사시가 될 수도 있다. 로마로 통하는 돌을 깐 길들이나 미국 대륙을 그물처럼 누비고 있는 고속 도로에서 크나큰 서사시를 읽을 수 있다면, 미루나무에 그늘진 한국의 논길 혹은 산 너머 이웃 마을로 통하는 한국의 산길에서 따뜻한 서정시를 들을 수 있다.

산천을 누비어 꿈을 꾸는 듯한 한국 시골들을 이어 놓은 한국의 옛 길들에서 우리는 극히 인간적인 것을 느낀다. 철도, 아스팔트가 깔리고 플라타너스에 그늘진 한국의 신작로도 아직 인간적인 호흡을 담고 있다. 그러나 바쁘고 부산한 고속도로, 큰 도시의 실꾸러미처럼 엉킨 길에서 우리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박자로 맞출 수 없는 비인간화된 삶의 형태를 체험한다. 그렇다면, 인간적 처온이 풍기는 길을 잃어 갈 때, 우리는 인간을 잃게 될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큰 도시의 네거리에서 복작거리다가도 잠시나마 버드나무 그늘진 시골 논길을, 냇물이 돌조각 사이로 흐르는 개천길을 걸어 보고 싶어지게 된다. 명상적이면서도 청청(淸淸)한 노랫가락 같은 한국의 길에서, 우리는 논과 밭, 산과 개천, 구름과 나무, 하늘과 땅, 인간과 자연과의 친근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체험하고, 그리하여 진정한 의미에서의 마음의 자유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박이문; 불문학자, 시인. 서울 출신. (1931~ )

서울대학교 문리대와 동 대학원 졸업. 소르본대학에서 불문학 박사. 미국 남가주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음. 이화여대 교수를 거쳐 미국 시먼즈 여대 교수를 지냄. 서적적이면서도 내면에 깊은 성찰을 담은 글을 남김.

4 월 19 일 금요일의 산책

빼앗을 수 없는 뜻과, 꺾이지 않는 기상과, 흐르지 않는 앎을 늘 지니도록 하라. <퇴계 이황>

봄밤은 그대로

일각(一刻)도 천금(千金)이여

꽃 향기 그윽한데 달도 밝아라

풍류에 섞인 노래

멀리 들려 오고

그네 소리에 짧은 밤 깊어 가누나. 《소식 蘇軾/춘야 春夜》

<루즈벨트의 4 가지 자유>

항구적인 평화는 다른 국민의 자유를 희생시켜서 얻을 수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우리들은 독재자들의 공격에 감연히 저항하는 민중에 대한 우리의 원조를 국제법의 침해이고 전쟁 도발 행위라고 하는 독재자들의 협박에 겁내지 않습니다. ..........

건전하고 강력한 민주주의의 토대에 관해 의심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정치적, 경제적 제도에 관해 우리 국민이 기대하고 있는 기본적인 사항은 단순합니다. 그것은 즉 청년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회 균등, 노동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직업을 부여하는 것,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보호의 손길을 뻗는 것, 소수자의 특권을 폐지하는 것, 모든 사람들의 시민적 자유를 확보하는 것, 학문에 있어서의 진보의 성과를 생활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 명료하며, 현대의 복잡성 가운데서도 잃어버려서는 안될 기본적인 사항입니다.

우리가 확보하려고 힘쓰고 있는 가까운 장래에 4 개의 기본적인 인간의 자유 위에 세워진 세계를 우리는 대망(待望)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세계의 모든 곳에서 적용될 것입니다.

둘째로는 세계 모든 곳에서의 모든 사람의 신앙의 자유입니다.

셋째로는 세계 모든 곳에서의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알기 쉽게 말하면 각국이 각기 그 주민에게 건강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경제적 이해(利害)를 의미합니다.

넷째로는 공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세계 모든 곳에 적용됩니다. 이것을 알기 쉽게 말하면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에 대해 폭력적인 공격 행위를 취할 수 없도록까지 철저한 세계적 군비 축소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한 것은 1천 년 뒤의 공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 우리 세대에서 실현될 수 있는 하나의 세계의 명확한 기초입니다.

- 1941 년 1 월 6 일 루우즈벨트 대통령의 연설 -

4 월 18 일 목요일의 산책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보다 현명해져라. 그러나 상대방에게 그것을 말하지 말라. <체스터필드>

행복을 파는 가게

황금찬

사랑받기를 원하는가

사람아,
받고 싶은 사랑보다
한 3배쯤
남을 사랑하라.
사람아,

세상에는
행복을 파는 가게가 없다네
또 하나의 하늘을
창조하고
꿈의 성문을 열면
열대의 님프가 피워 올리는
이름 없는 꽃 한 송이

보이는 것은
모두 순간적인데
그러나 보이지 않은 것은
영원한 강물

신앙의 배를 띄우고
나 한 마리 백조

등을 밝히고
잃어버린 구를 한 방울
그 속에 눈 뜨는
청자에 그런 새 한마리.

소설가 킹슬리는 터너의 화랑에서 <해상의 폭풍우>란 그림에 반해 버렸다. 「어떻게 이런 명작을 그리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어느 날 어부 한 사람에게 폭풍우가 일거든 배를 태워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거센 폭풍이 휘몰아치던 어느 날 배에 오른 저는 마스트에 나를 결박해 달라고 어부에게 말했습니다. 굉장한 폭풍우였습니다. 배에서 도로 내리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결박을 당해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폭풍우와 마주 서서 그것을 피부에 느꼈을 뿐만 아니라 폭풍우가 제 몸을 감싸 안고 저 자신이 폭풍우의 일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듣고 있던 킹슬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글썽해 있었다.

4 월 17 일 수요일의 산책

진리는 광선과 같다. 어떤 손으로도 그것을 더럽힐 수 없다. 《J. 밀턴》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둑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프랑스의 루이 에르네스트 모피 장군은 48년 동안 한 번도 극장, 카바레, 영화관 등 모든 오락기관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의 원수(元帥) 등을 40명이나 낸 무문(武門)의 명가에 태어났고, 소년시절에 세운 맹세를 엄숙히 지켜 번화한 프랑스의 수도 한복판에 살면서도 완전히 엄숙한 생활을 보냈다. 1870년 보불전쟁 후, 그가 열세 살 때에 고향인 메스 시(市)가 독일의 영토가 되었다. 적국의 압제 밑에 삶을 참지 못한 루이 소년은 남 몰래 탈출하여 프랑스의 웨스트포인트라고 불리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소년은 그가 고향인 메스 시를 떠날 때 고향이 다시금 프랑스의 지배로 돌아올 때까지는 절대 모든 환락 장소는 드나들지 않겠다고 맹세하여 40년이란 긴 세월 동안 그 날이 올 때까지 지켜 나갔다. 그 동안 그는 육군에서 입신양명하여 빛나는 군사령관이라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가 군적에 있었고, 그의 스파르타식의 맹세를 지키게 했다. 모피 장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제십군단(第十軍團)을 지휘하여 조국에 공헌한 바 컸다. 독일의 패배로 전쟁은 끝나고 메스 시가 다시 프랑스 영토로 돌아왔을 때 장군의 눈물겨운 헌신은 프랑스 국민에 의한 초대 메스 지사(知事)의 임명으로 보답되었다. 드 모피 지사는 그의 평생의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 처음으로 영화관에 구경하러 갔다. 로렌 지방의 수도 메스 시의 주민들은 장군이 영화관에 가는 것을 무슨 축하일의 행사처럼 마음으로부터 환영하여, 가는 길 양쪽에는 남녀노소의 시민들이 줄을 지었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 최후의 기사라고도 할 만한 용감한 군인의 영광의 날을 환호성을 올리며 축하하였다.

[임성삼; 프랑스의 장군이 아니라 독일의 장군 같은 느낌을 줍니다.]

4 월 16 일 화요일의 산책

성공의 비결은 어떤 직업에 있든 간에 그 분야에서 제 1인자가 되려고 하는 데에 있다. <앤드류 카네기>

[임성삼; 성공한 기업가인 이 분은, 잘 나가는 분야를 선택함으로써 성공이 보장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안개에 잠긴 듯 비가 내리듯

강에 걸려 있는 다리의 모습은 희미하고

복숭아꽃에도 버들빛 무르익어

산길이 그윽하다

마침

이별하는 사람들의

속맘을 알고

실 같은 그 가지로

봄바람을 움킨다. 《정곡 鄭谷/유 柳》

유명한 희극 배우인 베크만이 어느 날 연극평론가를 모욕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 평론가의 집에 가서 증인 입회하에 사과하도록 언도를 받았다. 결정된 시각에 그 평론가는 증인들에게 둘러싸여 베크만을 기다렸다. 기다릴 사이도 없이 벨이 울렸다. 베크만이 반쯤 열린 문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상인 슐체 씨의 집이 여깁니까？」 하고 물었다. 평론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하였다. 「아니오, 여기가 아닙니다.」 그러자, 「예,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베크만은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임성삼; 나는 이 사람의 자존심을 좋아합니다. 희극 배우도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독일 사회의 기풍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월 15 일 월요일의 산책

끝나 버리기 전에는 무슨 일이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키케로>

신록예찬 이양하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4시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 중에서도 그 혜택이 가장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에 녹엽(綠葉)이 우거진 이 때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 -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오늘도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우리 연전(延專, 끌 연, 오로지 전) 일대를 덮은, 신록은 어제보다도 한층 더 깨끗하고 신선하고 생기 있는 듯하다. 나는 오늘도 나의 문법이 끝나자 큰 무거운 짐이나 벗어 놓은 듯이 옷을 훨훨 털며 본관 서쪽 숲 사이에 있는 나의 자리를 찾아 올라간다. 나의 자리래야 솔밭 사이에 있는 겨우 걸터앉을 만한 조그만한 소나무 그루터기에 지나지 못하지만 오고 가는 여러 동료가 나의 자라라고 명명하여 주고 또 나 자신이 소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솔잎 사이로 흐느끼는 하늘을 우러러 볼 때 하루 동안에도 가장 기쁜 시간을 가질 수 있으므로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마다 나는 한 큰 특권이나 차지하는 듯이 이 자리를 찾아 올라와 하염없이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물론 나에게 멀리 군속을 떠나 고고한 가운데 처하기를 원하는 선골(仙骨)이 있다거나 또는 나의 성미가 남달리 괴퍅하여 사람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역시 사람 사이에 처하기를 즐거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갑남을녀(甲男乙女)의 하나요, 또 사람이란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사람으로서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사람 사이에 살고 사람 사이에서 울고 웃고 부대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때 - 푸른 하늘과 찬란한 태양이 있고 황홀한 신록이 모든 산 모든 언덕을 덮는 이 때 기쁨의 속삭임이 하늘과 땅, 나무와 나무, 풀잎과 풀잎 사이에 은밀히 수수(授受)되고, 그들의 기쁨의 노래가 금시에라도 우렁차게 터져 나와 산과 들을 흔들 듯한 이러한 때를 당하면, 나는 곁에 비록 친한 친구가 있고 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자연에 곁눈을 팔지 아니할 수 없으며, 그의 기쁨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사람이란 - 세속에 얽매여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주머니의 돈을 세고 지위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거나, 또는 오욕(五慾)칠정(七情)에 사로잡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데 마음의 영일(寧日, 편안할 영)을 갖지 못하는 우리 사람이란 어떻게 비소(卑小)하고 어떻게 저속한 것인지 결국은 이 대자연의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조화를 깨뜨리는 한 오점 또는 잡음밖에 되어 보이지 아니하여 될 수 있으면 이러한 때를 타 잠깐 동안이나마 사람을 떠나 사람의 일을 잊고, 풀과 나무와 하늘과 바람과 한가지로 숨쉬고 느끼고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사실 이즈음의 신록에는 우리 사람의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들어 있는 듯하다. 신록을 대하고 앉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낸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모든 티끌 - 나의 모든 욕망과 굴욕과 고통과 곤란 - 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다음 순간, 별과 바람과 하늘과 풀이 그의 기쁨과 노래를 가지고 나의 빈 머리에, 가슴에, 마음에 고이고이 들어앉는다. 말하자면 나의 흉중에도 신록이요, 나의 안전(眼前)에도 신록이다. 주객일체(主客一體) 물심일여(物心一如), 황홀하다 할까, 현요(眩耀, 아찔할 현, 빛날 요)하다 할까, 무념무상(無念無想) 무장무애(無障無 , 가로막을 장, 거리낄 애), 이러한 때 나는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가진 듯이 행복스럽고, 또 이러한 때 나에게는 아무런 감각의 혼란도 없고 심정의 고갈도 없고, 다만 무한한 풍부와 유열(愉悅, 즐거울 유, 기쁠 열)과 평화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때에 비로소 나는 모든 오욕(汚辱)과 우울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고, 나의 마음의 모든 상극과 갈등을 극복하고 고양하여 조화 있고 질서 있는 세계에까지 높인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러기에 초록에 한하여 나에게는 청탁(淸濁)이 없다. 가장 연한 초록에서 가장 짙은 초록에 이르기까지 나는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 그러나 초록에도 짧으나마 일생이 있다. 봄바람을 타 새 움과 어린잎이 돋아나올 때를 신록의 유년이라 하면, 삼복 염천 아래 울창한 잎으로 그늘을 짓는 때를 그의 장년 내지 노년이라 하겠다. 유년에는 유년의 아름다움이 있고 장년에는 장년의 아름다움이 있어 취사하고 선택할 여지가 없지마는, 신록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이즈음과 같은 청춘 시대 - 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의 하나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청신하고 발랄한 담록을 띄는 시절이라 하겠다. 이 시대는 신록에 있어서 불행히 짧다.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혹 2, 3 주일을 셀 수 있으나,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불과 3, 4 일이 되지 못하여 그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이 짧은 동안의 신록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참으로 비할 데가 없다. 초록이 비록 소박하고 겸허한 빛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때의 초록은, 그의 아름다움에 있어 어떤 색채에도 뒤서지 아니할 것이다. 예컨대 이러한 고귀한 순간의 단풍 또는 낙엽송을 보라. 그것이 드물다 하면 이즈음의 도토리, 버들 또는 임간(林間)에 있는 이름 없는 이 풀 저 풀을 보라. 그의 청신한 자색(姿色), 그의 보드라운 감촉, 그리고 그의 그윽하고 아담한 향훈(香薰), 참으로 노랄 만한 자연의 극치의 하나가 아니며, 또 우리가 충심으로 찬미하고 감사할 만한 자연의 아름다운 혜택의 하나가 아닌가!

[임성삼; 지금이 바로 이런 계절입니다. 우리 학교의 모든 곳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이양하; 영문학자, 수필가. 평남 강서 출생(1904~1963)

일본 도쿄대학교 영문과 졸업. 연희전문학교와 서울대 교수를 지냄. 영국 정통파의 수필을 도입하여 김진섭과 함께 서구적 수필의 기초를 다짐.

4 월 12 일 금요일의 산책

공포로 인해 타협하지 말 것이며, 남이 나에게 타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말라 <케네디>

개나리가 지고 목련이 지고 라일락이 한창이다. 총총하게 들어박힌 꽃잎이 북실북실한 꽃떨기를 이루고 있다. 흰 놈이 청초한 소녀라면 자줏빛은 멋들어진 큰아기의 모습이다. 자줏빛이 나는 놈은 봉오리 적에는 진하다가 차차 활짝 피어 갈수록 연해진다. 일명이 릴라, 한자어(漢字語)로 정향(丁香), 우리말로는 「수수꽃다리」라 한다던가. 라일락은 그 꽃 모양보다도 그 향기로 사랑을 받는다. 라일락꽃 밑에서 잠이 들었다가 취해서 정신을 잃은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과장만은 아닌 듯싶다. 《천관우 千寬宇/신세시기 新歲時記》

[임성삼; 이제 라일락이 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올해는 아직 개나리와 목련이 피어 있습니다.]

강철왕이라고 불린 미국의 카네기가 말한 "실패한 사람들의 공통점 10 가지" 중 하나:

삶의 목표가 없이 인생의 지름길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노력은 하지 않고 성공의 왕도(王道)만 찾아 다니는 것.

Andrew Carnegie 1835~1919

미국 기업가·자선사업가. 영국 던펌린 출생. 가난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나 1848년 가족이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방적공을 시작으로 기관조수·전보배달원·전신기사 등 여러 가지 직업을 거친 뒤, 53년 펜실베이니아철도에 취직하여 관리자가 되었다. 철도건설이 급속하게 진척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철도경영보다 철도건설 자재의 공급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제철업에 진출하였다. 주력제품은 레일이었는데 곧 영국의 제강법 발명가 H.베세머와 알게 되어 강철시대가 도래할 것을 확신하고 70년대의 불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강소의 건설에 착수하였다. 80년대에는 몇몇 경쟁기업을 지배하에 넣었고 90년대에는 오대호 주변의 광상(鑛床)·탄광·선박·철도를 사들였다. 99년에 이들 사업을 통합하여 카네기제강소로 개편, 원료에서 완제품에 이르는 일관생산체제를 확립시켰다. 그러나 곧바로 철도에서 철강으로 지배망을 확대하고 있던 월가(街)의 금융집단과 강철제품시장을 둘러싼 각축전으로 곤경에 빠져, 1901년 모건상회에 기업을 매각하고 실업계에서 은퇴하였다. 그 뒤 18년 동안 <부(富)는 신으로부터 맡겨진 것>이라는 신념에 따라 3억 5000만 달러의 기금으로 카네기홀·카네기재단·카네기공과대학 등 많은 교육·문화 시설을 설립하고 자선사업에 관여하는 한편, 사업과 사회의 본연의 자세를 설파하는 저술활동에 전념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 《부(富)와 복음(1900)》《카네기 자서전(1920)》 등이 있다.

4 월 11 일 목요일의 산책

지금 우리 나라를 방문 중인 핀란드 대통령 <타르야 할로넨>(여자)이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여학생들에게 권한 말:

"Carpe diem. (Seize the day)"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생각하고 즐겨라. 그리고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서 행동하라.

　

짜장면

정진권

짜장면은 좀 침침한 작은 중국집에서 먹어야 맛이 난다.

그 방은 퍽 좁아야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깨끗지 못해야 하고, 칸막이에는 콩알만한 구멍들이 몇 개 뚫려 있어야 어울린다.

식탁은 널판으로 아무렇게나 만든 앉은뱅이여야 하고, 그 위엔 담뱃불에 탄 자국들이 검게 또렷하게 무수히 산재해 있어야 정이 간다.

고춧가루 그릇은 약간의 먼지가 끼어 있는 게 좋고, 금이 갔거나 다소 깨어져 있으면 더욱 운치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고춧가루는 누렇고 굵고 억센 것이어야 한다. 식초병에도 다소 때가 끼어 있어야 가벼운 마음으로 손을 댈 수 있다.

방석도 때에 절어 윤이 날 듯하고, 손으로 잡으면 단번에 쩍하고 달라붙을 것 같은 것이어야 앉기에 편하다.

짜장면 그릇의 원형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선 알아본 바 없으나, 가장 흔한 것은 희고 납작한 것에 테가 두어 줄 그어져 있는 것인 듯한데, 할 수 있으면 거무스레하고, 거기다 한두 군데 이가 빠져 있으면 좋다.

그리고 그 집 주인은 뚱뚱해야 한다. 머리엔 한 번도 기름을 바른 일이 없고, 인심 좋은 얼굴에는 개기름이 번들거리며, 깨끗지 못한 손은 소두방(솥뚜껑)만 하고, 신발은 여름이라도 털신이어야 좋다. 나는 그가 검은 색의 중국옷을 입고, 그 옷은 때에 찌든 것이기를 바라지만, 지금은 그런 옷을 찾기 어려우니 낡은 스웨터로 참아 두자. 어린 나를 무척 귀여워해주던 내 고향의 짱궤는 스웨터가 아니었는데....... 하여간 이런 주인에게 돈을 치르고 나오면 언제나 마음이 평안해서 좋다.

내가 어려서 최초로 대면한 중국 음식이 짜장면이었고, 내가 처음 가 본 내 고향의 중국집이 그런 집이었고, 이따금 흑설탕을 한 봉지씩 싸주며 "이거 먹어 해, 헤헤헤"하던 그 집 주인이 이런 사람이어서, 나는 짜장면이 중국 음식의 전부로 알았고, 중국집이나 중국 사람은 다 그런 줄로만 알고 컸다.

스무 살 때던가, 서울에 처음 왔을 때도 나는 짜장면을 잘 사먹었는데, 그 그릇이나 맛, 그 방 안의 풍경이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비록 흑설탕은 싸 주지 않았으나 그 주인의 모습까지도 내 고향의 짜장면, 그 중국집, 그 짱궤와 다르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변두리만 찾아서였을까?

해서, 내가 처음으로 으리으리한 중국집을 보았을 때, 그리고 엄청난 중국 요리 앞에 앉았을 때, 나는 그것들이 온통 가짜처럼 보였고, 겁이 났고, 괜히 왔구나 했다.

서울 시골 할 것 없이 음식점은 많이도 불어났다. 한식, 중국식, 일본식, 서양식, 또 무슨 식이 더 있는지 모른다. 값이 비싸다는 데도 있고, 보통이라는 데도 있고, 싼 듯한 곳도 있다. 비싸다는 곳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보통이라는 데는 더러 가 보았다. 그러나 얻어 먹을 때는 불안하고 내가 낼 때는 갈빗대가 휘어서 그 곳의 분위기와 그 음식맛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음이 큰 흠이다.

그러므로 내가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곳은 그 싼 듯한 곳일 수밖에 없고, 그 싼 듯한 곳 중에선 위에 말한 그런 주인의 그런 중국집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싸구려 한식은 집에서 늘 먹으니 갈 필요가 없고, 싸구려 왜, 양식은 먹어 봤자 국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국적 있는 왜, 양식을 먹으려면 비싸다는 데 내지 최소한 보통이라는 덴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친애하는 짜장면 장수 여러분들도 자꾸만 집을 수리하고 늘리고 새 시설을 갖추는 모양이어서, 마음 편히 갈 만한 곳이 줄어들까 걱정이다. 돈을 벌고, 빌딩을 세우고, 나보다 훌륭한 고객을 맞고 싶은 것이야 물론 그분들의 큰 소원이겠지만, 적어도 내가 사는 동네와 내가 다니는 직장 근처에만은, 좁은 데다 깨끗지 못한 중국집과 내 어린 날의 그 짱궤 같은 뚱뚱한 주인이 오래오래 몇만 남아 있어 줬으면 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

그러면 나는 어느 일요일 저녁 때, 호기 있게 내 아이들을 인솔하고, 우리 동네 그 중국집으로 갈 것이다. 아이들은 입술에다 볼에다 짜장을 바르고 깔깔대며 맛있게 먹을 것이고, 나는 모처럼 유능한 아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퇴근길에 친구를 만나면, 나는 그의 어깨를 한 팔로 얼싸안고 그 중국집으로 선뜻 들어갈 것이다. 양파 조각에 짜장을 묻혀 들고, "이 사람, 어서 들어"하며, 고량주 한 병을 맛있게 비운 다음, 좀 굳었지만 함께 짜장면을 나눌 것이다. 내 친구도 세상을 좁게 겁많게 사는 사람이니, 나를 보고 인정 있는 친구라고 할 것이 아닌가.

정진권; 수필가. 충북 영동 출생. (1935~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제물포 고등학교 교사. 문교부 편수관.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제 1 회 수필문학 신인상 수상. 그의 글은 소시민들의 생활을 슬픔 없는 맑은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 고귀한 행복을 찾아보려는 선의의 마음을 잘 나타내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는 평이다. 수필집에는 <푸른 나무들에게 저 붉은 해를>, <비닐 우산> 등이 있다.

[임성삼; 이 분의 짜장면에 대한 분석 능력은, 좋은 논문에서 볼 수 있는 분석보다 더욱 완벽합니다.]

4 월 10 일 수요일의 산책

지혜의 기능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다. <키케로 >

좁은 들창을 열어젖뜨리면 옆집 이름도 모를 나뭇가지가 그 싱싱한 신록의 잎새들을 담너머로 갸웃이 뻗쳐 내밀고 5월의 맑은 창공 위로 한없이 한없이 뻗쳐 나가고 싶다는 듯이 하느적하느적 미풍에 속삭이는 듯 기름지고 무성해 가는 신록의 향기를 풍기는 오후면 나는 곧잘 좁은 방에 혼자 앉아서 상추쌈의 미각에 신록을 느낀다. 시퍼런 푸성귀를 한 줌 손 위에 담뿍 넣고 그 위에 고추장을 얹고 밥을 얹고 또 고추장을 얹어 가지고 주머니처럼 오므려 입에 집어 넣는 상추쌈의 미각은 대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신록의 미각이다. 《김광주 金光洲/인간이후 人間以後》

전기와 자기(磁氣)에 대한 발견을 한 마이클 패러데이는 젊은 시절 책방의 점원 노릇을 하였다. 고객에게 얻은 「H. 데이비의 강연회」 입장권이 인연이 되어 당시 대과학자이며 왕립 연구소에서 화학을 연구하고 있던 데이비 경의 제자가 되었다. 패러데이가 데이비의 강연을 듣고 모두 필기하여 그것을 정서하여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은사에게 보내자, 얼마 안 있어 왕립 연구소에서 일하도록 허가가 내렸다. 그 후 비서로 어느 곳에나 동행하고, 또 데이비의 기대에 보답하여 전기와 자기에 대한 위대한 발견을 하였다. 어느 사람이 데이비에게, 「당신이 이제까지 한 일 중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패러데이를 제자로 가진 일이다.」라고 대답하였다.

4 월 9 일 화요일의 산책

교사(敎師)의 중요한 사명은 학생에게 모든 사물의 의미를 밝혀 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교사의 사명은 학생의 '정신의 문'을 두드려 주는 것이다. <타고르>

기나긴 겨울의 억압과 살육과 횡포 속에서 따사로운 햇볕이 되살아나면 거리에는 봄을 알리는 손이 늘어 간다. 그러나 꽃가게에 꽃이 나와 있어도 그것은 온실에서 피어난 것인지라 믿어지지 않는다. 골목마다 금붕어 장수의 노곤한 외침이 지나가도 그저 한가로울 뿐이다. 그러나, 이슬비가 뿌리고 간 뒤 가로수마다의 야들야들한 잎이 싹 트면 비로소 봄을 확인하는 것이다. 더욱이 평행을 이루고 뻗어 나가는 가로수의 새잎들이 솜털인 양 구름인 양 부풀어 가는 풍경은 진정 도시인의 가슴에 봄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차범석 車凡錫》

멀리 떨어져 있는 산 속에서 보물을 찾기 전에, 먼저 내 두 팔에 있는 보물을 충분히 이용하도록 하라！ 그대의 두 팔이 부지런하다면 그 속에서 많은 것이 샘솟아 나올 것이다. 사람은 하는 일에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가 옳다고 굳게 믿는 일을 실행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자기에게 그러한 힘이 있을지에 대해 망설이지 말고 그대로 나아가라. 《J.W.괴테》

4 월 8 일 월요일의 산책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닥치지 않았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다. 현재 안에서만 인간의 영혼에 자유로운 신성(神性)이 나타난다. <톨스토이>

춘흥 春興(봄의 흥취)

정몽주(鄭夢周)

春雨細不滴 춘우세부적

봄비는 가늘어 물방울이 되지도 못하여

夜中微有聲 야중미유성

밤중에 아주 가는 소리 있었다.

雪盡南溪漲 설진남계창 불을 창

눈은 그치고 남쪽 개울이 불었는데

草芽多小生 초아다소생 싹 아

풀의 싹이 조금 돋아났구나.

[임성삼; 지난 주말에는 다행히 상당한 정도의 봄비가 있었습니다.]

주여, 이것이 당신에게 드리는 나의 기도입니다. 이 가슴속 넘쳐나는 오만과 편견의 뿌리를 잘라 아예 싹트지 못하게 하십시오. 내 기쁨과 슬픔을 조용히 참고 견딜 힘을 주십시오. 내 사랑이 당신을 섬김에 풍성하게 열매 맺도록 힘을 주십시오. 가난한 사람을 어여삐 여기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거짓된 사람 앞에 무릎을 끓는 일은 없도록 힘을 주십시오, 이 마음이 나날의 하찮은 일들 위에 높이 초연할 힘을 주십시오. 그리고 내 생각이 애정을 지니고 당신의 뜻에 순종하도록 힘을 주십시오. <타고르 [기탄 잘리]>

4 월 5 일 금요일의 산책

[임성삼; 오늘 식목일의 산책을 한흑구 교수님의 수필과 함께 합니다.]

진달래

한흑구

아침에 아내가 빙그레 웃으면서, 진달래를 한 아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것 봐요! 진달래가 폈어요! 애들이 산보 갔다 꺾어 왔어요! ‚

진달래를 안고 들어오는 아내의 얼굴에도 봄빛이 어리어 있는 것 같았다.

아 참말 폈구나! ‚

그 환안한 얼굴들에서, 나는 새로운 봄빛을 보았다.

그 싸늘한 바람과, 그 찬 서리와, 그 늦은 봄눈의 자국도,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아내는 책상 위에 놓인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고려자기 꽃병에다가, 진달래꽃 가지들을 조심성 있게 꽃아 놓았다.

어서 세수하세요. ‚

아내는 진달래 같은 얼굴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

읽고 있던 책을 덮어 버리고, 나는 파아란 꽃병 위에 꽂혀 있는 진달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봄의 천사(天使)들인 양, 새롭고, 예쁘고, 화안한 얼굴들이었다.

두 송이, 또는 네 송이씩 짝을 지어서 볼들을 맞대고 피어 있었다.

볼수록 환하고 깨끗하고 어여뻐서, 가만히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분홍색이 되기에는 너무나 진하고, 보라색이 되기에는 너무나 연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옳은 색을 찾아 낼 수가 없어서, 나는 끝없이 바라만 보았다.

누군가 진달래를 수줍어하는 처녀의 얼굴 같다고 하였지만, 그렇게 수줍어하는 어색한 빛을 나는 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 새롭고, 환하고, 봄 처녀 같은 얼굴을 하였지만, 장미와 같이 무르녹는 정열(情熱)을 남몰래 간직하고 있는 것도같이 보였다.

○

그러나, 어디로 보나, 진달래는 봄에 피는 꽃이 분명하였다.

찬 바람과, 서리와, 늦은 눈 속에서도, 그 환하고 새로움을 보여 주기 위하여 애타던 모습을 감출 수 없었다.

애수적인 진달래, 수줍은 처녀와 같은 진달래, 그러나 새롭고, 화안하고, 어여쁜 진달래꽃들이 몇백 년의 역사를 지닌, 맑고 파아란 고려의 꽃병 속에 꽂혀서 말 없이 웃고 있지 않는가.

나는 가만히 눈을 감으면서 산(山)마다, 언덕마다, 또한 낭떠러지마다, 봄이면 봄마다 으레 피어나는 무수한 진달래의 숲들을 연상하여 보았다.

○

어릴 때에 보던 모란봉(牡丹峰) 위의 진달래, 나의 고향(故鄕)의 진달래, 한 송이 따서 입 속에 넣던 아기 진달래.

진달래 동산으로 유명한 영변(寧邊) 약산(藥山) 동대(東臺)의 진달래.

바위 틈마다, 바위들을 뒤덮을 듯이 피어 나오던 진달래.

분홍 치마들을 깔아 놓은 듯이 동대(東臺) 위를 덮었던 진달래.

삼십(三十)대의 소월(素月)이가 노래하던 약산(藥山) 동대(東臺)의 진달래.

이십(二十)대의 나도 구경갔던 동대(東臺)의 진달래. 평안북도(平安北道)라, 오월(五月)에야 늦게 피던 진달래였다.

봄마다 진달래는 우리 땅 어느 산(山)에도 어느 언덕에도 피어나왔다. 우리는 해마다 진달래를 보고서 봄을 느꼈고, 봄을 꿈꾸었다.

○

우리 나라 산(山)에 서 있는 특색(特色) 있는 나무는 소나무다.

초동(草童)도 벌부(伐夫)도 소나무는 자르지 않았다.

우리 나라 산(山)에 피어나는 특색(特色) 있는 꽃나무는, 두말 할 나위 없이, 고운 진달래꽃이다.

자르고, 베어 내도, 그냥 퍼져 나가고, 그냔 무성해서, 제일 먼저 산(山)과 언덕 들을 봄의 얼굴로 단장한다.

오늘 아침, 애들이 꺾어 온 진달래는 아무 말이 없이 나의 책상 위에 꽂혀 있다.

봄을 지니고 온 진달래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대(對)하는 나의 마음 속에는 그 따뜻하고, 아지랑이같이 곱던 꿈이 흩어져 버린 지가 오래다.

어둡고, 차디찬 긴 겨울 밤이 언제나 지나가고, 마음 속에 아늑한 새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창 밖에는 아직도 회오리바람이 끊이지 않고, 볕을 볼 수 없이 뽀얀 안개와 구름에 싸여 있다.

새말갛고 파아란 고려자기 꽃병 속에 꽂혀 있는 저 진달래들도, 기나긴 겨울과, 바람 찬 긴 밤이 밝아 오기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을까?

○

봄의 천사들인 양, 새롭고, 예쁘고, 화안한 진달래의 얼굴들을, 나는 또 한 번 쳐다보았다.

4 월 4 일 목요일의 산책

나는 믿는다. 인간은 새로운 발견에서 악보다는 선을 끌어낸다고. <피에르 퀴리>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백악 바위 틈에도 진달래는 송이송이 봄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김동인 金東仁/운현궁(雲峴宮)의 봄》

산기슭에 조그만 계집애들이 분홍 치마를 입고 쪼그리고 앉은 것 같은 한 무더기 두 무더기 피기 시작한 진달래꽃이었다. 그 연연한 꽃 입술은 보드랍게 봄을 토하는 것 같다. 《심훈 沈熏/영원(永遠)의 미소(微笑)》

우리들은 진리의 길은 좁고 곧다는 것을 알았다. 박애의 길도 역시 같은 것이다. 이 좁은 길을 걷는 데는 칼날 위를 걸어가듯이 균형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줄타는 사람은 굳게 매어져 있는 밧줄 위에서 전 능력을 집중하여 춤춘다. 진리와 박애의 가는 줄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보다 큰 주의가 필요하며, 티끌만한 부주의가 있어도 떨어지고 만다. 다만 부단한 정진에 의해서만이 박애를 자신 속에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박애를 실천하는 데는 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다. 《M.K.간디》

4 월 3 일 수요일의 산책

[임성삼; 우리 학교 교정에 목련이 활짝 피었습니다. 한흑구 교수님의 글과 함께 오늘의 산책을 합니다.]

흰 목련

한흑구

목련(木蓮)이라는 말은 들은 지는 오래 되었지마는 목련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그림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나무에서 연(蓮)꽃이 피는 것이 목련이라고 하나 하고 느꼈을 뿐, 굳이 찾아보려고 애쓰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우연한 기회에 처음으로 목련을 보고 알아내게 된 것은 사십이 훨씬 넘어서의 일이었다.

경북(慶北) 청하(淸河)에 있는 보경사를 처음으로 찾았을 때의 일이었다.

보경사의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문안으로 들어서자, 거의 아름드리나 되는 큰 나무에 진한 자줏빛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두 길이나 넘는 큰 나무에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꽃들이 필 수가 있나 하고 생각하자 그것이 목련인 것을 남에게 묻지 않고도 곧 알 수가 있었다.

거의 연꽃 만큼 크기도 하지만 연꽃같이 쫑긋이 서있거나, 앉아 있는 자세였다. 어쩌면 두부장수의 손종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모양 같기도 하였다.

갈피갈피 겹쳐서 펼쳐진 꽃잎들을 들여다보면 옥수수 이삭을 짜개서 펼친 듯한 모양이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이 아름다운 자줏빛 목련을 다시 또 보게 된 것은 경주에 있는 고속버스 정류장 옆의 어떤 사가(私家)의 안뜰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처음으로 흰 목련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대구 효성여대의 캠퍼스에서였다.

삼 년 전 처음으로 흰 목련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그리 신기하게 여기지 않고, 색이 흴 뿐이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금년 봄엔, 웬일인지 흰 목련이 나의 눈을 더없이 기쁘게 해주었다.

캠퍼스 안에 여기저기 서 있는 수십 그루의 흰 목련들이 꽃망울들을 쫑긋이 세우기 시작한 것이 사 월 초였다.

한 주일이 지나서 다시 캠퍼스 안에 들어섰을 땐 웬 흰 학(鶴)의 떼들이 나무 위에 내려앉았나 하고 놀랄 지경이었다.

흰 학의 구부러진 목들과 같이 흰 목련의 꽃봉오리들이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학의 목과 같이 우아하고, 고아하고, 깨끗하고, 순스럽고, 아름답고.

흰 옷을 좋아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기도 하고 청초한 과부의 흰 옷자락같이 외롭기도 하고.

그 다음 주일에 다시 캠퍼스에 들어섰을 때에는, 언제 때아닌 흰 함박눈이 나뭇가지 위에 소복이 내려앉았나 하고, 그 황홀한 광경과 화사한 모양에 나의 눈들이 사로잡힐 지경이었다.

강의 시간에도 흰 목련의 고아한 자세가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감탕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도 곱듯이 나무 위에서 신선한 대기(大氣)를 숨쉬고 피어난 목련은 천사의 옷깃같이 깨끗하고 성스럽고 더욱더 고왔다.

강의가 끝나고 나올 때에는 한 줄기 세찬 꽃샘바람에 꽃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서 흰 나비마냥 훨훨 날아가다가 새로 자라 나온 푸른 잔디밭 위에 내려앉았다.

금년 봄엔 비로소 흰 목련이 곱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껴 볼 수가 있었다.

학의 목과 같이 고아한 꽃봉오리, 흰 눈과 같이 맑고 깨끗한 자세, 하늘에 날아 다니는 흰 나비와 같은 꽃 이파리, 흰 옥수수를 벗겨 놓은 듯한 꽃송이, 연못에 떠 있는 연꽃같이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자세, 어쩌다 보면 두부장수의 손종이 거꾸로 세워진 것 같은 모양이 하도 아름답기만 했다.

나는 또 한 번 목련의 아름다운 자태를 반기며, 그 희고 보드라운 꽃 이파리들을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어떤 향내가 코를 통해서 나의 가슴속 깊이 숨어드는 것 같았다.

(1975 년 지음; 저자의 나이 66 세.)

한흑구(1909~1979)

수필가, 번역문학가. 평양 출생. 1929 년 도미하여 시카고의 노스파크 대학에서 영문학을, 템플 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 종합지 대평양과 문예지 백광의 창간을 주재. 1945 년 월남하여 수필 창작에 몰두. 1958 년 포항수산대학 교수로 임명. 1974 년 포항수산대학 정년퇴임. 1975 년 효성여자대학 강사.

4 월 2 일 화요일의 산책

이 세상에는 그릇된 생활을 하고 있는 세 가지 인간형이 있다. 금세 화를 내는 인간, 간단히 사람을 용서하는 인간, 너무나도 완고한 인간이다. 《탈무드》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 김상용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은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 작품 해설

이 시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흙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어하는 작가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남(南)'이 주는 밝고 건강한 이미지는 작가가 추구하는 삶과 조화를 이룬다. 작가는 어떤 유혹이 있더라도 도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으로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시의 백미는 마지막 연의 2행이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잔잔한 미소로 답하는 모습은 삶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우러나는 초월과 달관의 경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이백(李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 시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즉 이 시는 전원 속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

問余何意棲碧山 문여하사서벽산 笑而不答心自閑 소이부답심자한

桃花流水杳然去 도화유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

나에게 "무슨 이유로 푸른 산에 삽니까?"하고 물으나,

웃으며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이 절로 한가롭구나.

복숭아꽃이 물에 흘러 아득히 떠가니

별천지요, 인간 세상이 아니로구나.

빅톨 위고의 "레 미제라블" 제 4 편, 2

“교수가 출석을 부르던 중이었어요. 당신도 알겠지만, 그럴때 교수들은 참 우스꽝스런 짓을 하지 않습니까? 세 번 불러서 대답이 없으면, 이름이 지워지고, 그렇게 되면 육십 프랑이 날아가버린단 말입니다.”

“교수님이 ‘마류스 퐁메르’를 부르자, 아무런 대답이 없었어요. 교수는 희망에 가득차서 더욱 큰 소리로 ‘마류스 퐁메르’를 되풀이 했어요. 그리고는 펜을 들었어요. … 교수는 말살(抹殺)의 검은 펜을 잉크에 찍은 후, 그 갈색의 눈으로 학생을 둘러보며, 세 번째로, ‘마류스 퐁메르’하고 되풀이 했어요. 내가 ‘네!’하고 대답했지요. 그래서 당신은 지워지지 않은 거예요. 교수는 나를 뚫어지게 들여다본 후, 출석을 부르기 시작하여 드디어는 내 이름 ‘레에글’을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네!’하고 대답했더니 교수는 호랑이 같은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는 겁니다. ‘학생이 퐁메르이면 레에글은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내 이름을 지워버렸습니다.” ……

마류스는 1 년에 30 프랑으로 누추한 방 하나를 빌어 쓰고 있었다.

[임성삼; 한 강좌의 비용이 누추한 방 2 년 임대료였습니다. 그리고 강의에 한 번 결석하면 그 강좌에서 이름을 지워버린 것이 1800 년대 초반의 프랑스 대학이었습니다.]

[참고; "레 미제라블"의 소개가 옆의 '책 소개' 5 번째에 있습니다.]

4 월 1 일 월요일의 산책

겸손하지 않고서는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톨스토이>

진달래는 식물학상 철쭉과에 속하는 꽃으로 통틀어 37종이 된다 하며, 조선 내 분포지역은 자못 광범하여 북으로 백두산과 남으로 제주도, 동으로 금강산에 이르기까지 이 꽃이 없는 데가 없으며, 흔히 관상용으로 정원에 재배도 하는 바 3월 방춘(芳春)이 되어 개나리가 노랗게 필 때는 진달래도 붉게 피어 봄빛을 아름답게 장식한다. 예로부터 이 꽃은 산옹촌동(山翁村童)에게나 시인묵객(詩人墨客)에게나 한가지로 애상(愛賞)을 받아 오니만큼 노래와 시에도 흔히 나타났으니, 어느 시인이, 「백분청유저두견 白粉淸油煮杜鵑」[임성삼; 흰 가루에 깨끗한 기름을 섞어 진달래꽃과 같이 부쳐먹네, 임백호의 시]이라고 읊은 것과 같이 수십 년 전만 해도 거의 연중행사의 하나로 하던 3월 3일의 화전놀이에는 진달래꽃을 따서 찹쌀가루[病米粉]와 섞어 참기름[芝麻油]에 띄워 지지나니, 이것이 삼춘행락(三春行樂) 중에 가장 운치 있는 놀이였으며 경향(京鄕)을 통하여 일반으로 성행하던 것이었다. 《문일평 文一平/화하만필 花下漫筆》

[임성삼; 이제 산수유꽃이 절정을 지났으나 아직 건재하고, 개나리꽃이 만발하였으며, 진달래꽃은 풍성하게 피어있고, 목련꽃이 반 쯤 피었으며, 벚꽃이 피기 시작하였습니다. 연못가에는 버드나무 잎이 연녹색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 죽순 먹고 대자리 삶기; 소림(笑林; 한말, 위초)

대나무가 없는 북쪽 지방인 한(漢)나라 사람이 남쪽의 오(吳)나라에 갔다.

오나라 사람이 죽순을 차려 놓았는데, 한나라 사람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오나라 사람은 “대나무요”하고 대답했다.

그는 집에 돌아와 대자리를 삶았으나 익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오나라 사람은 거짓말을 잘하여 나를 이렇게 속이는구려.”

주(註); 우리는 이처럼 어리석지는 않다. 그러나 극히 적은 지식에 만족하여 잘 살피지 않고 아무렇게나 처리하다가 결국 낭패를 당하고서는 반대로 속았다고 남을 원망해 본 적은 없는가? <우언의 재미와 교훈, 윤승준 지음, 월인 출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