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과 신숙주의 과거시험 답안
 
 이 과거 답안이 실려있는 책은 "명문명답으로 읽는 조선 과거 실록"이다.  국민대 교수인 지두환 번역이며 동연출판사에서 1997 년 출판된 책이다.
  이 과거를 보기까지 두 분이 겪은 시험을 간단히 소개한다.
  성삼문은 1418 년 태어나셨고, 신숙주는 한 살 위이다.
  근보 성삼문은 만 17 살인 1435 년에 생원시를 합격하고, 20 세인 1438 년 식년 문과에서 정과로 급제하셨다. 이 때 하위지도 함께 급제하였다.
 신숙주는 조금 늦게 만 21 살인 1438 년 생원, 진사시를 합격하고, 22 살인 1439 년 친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문과에 합격한 두 분은 모두 관직에 등용되어 결국 집현전에서 모여 공부하게 되었다. 신숙주가 남의 숙직까지 도맡아하며 궁궐에 있는 책을 밤 늦게까지 읽다가 그대로 잠든 것을 보고 세종대왕께서 어의를 덮어주라고 지시하신 일도 이 기간에 있었다.
  1446 년 9 월 29 일 훈민정음 반포에는 두 분 모두 공이 컸다. 두 분 모두 음운에 대한 연구를 위해 명나라에 10여 차례 다녀왔다는 이야기가 두 분의 전기에 모두 나온다. 두 분이 매번 같이 가셨는지, 서로 다른 시기에 가신 경우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두 분이 아주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근보의 시에 신숙주가 지은 시의 운을 따서 지은 것이 몇 편 전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1447 년 이 답안을 작성한 문과 중시에서 근보 성삼문[만 29 세]은 장원급제하고, 신숙주[만 30 세]는 4 등에서 10 등까지인 을과에 급제를 하였다. 앞에서 말한 신숙주가 숙직을 도맡아가며 열심히 한 공부의 결과가 이 답안지에 보인다.
  신숙주는 근보 보다 한 살 위이다. 그러나 생원시험, 문과 대과를 합격한 시기는 조금씩 늦다. 단지 이 문과 중시에서는 같이 합격하였으나, 역시 장원은 근보가 차지하였다.
  [김종서와 황보인이 죽은 계유정난은 1453 년이다. 이 후에 1454 년 근보 성삼문은 집현전 부제학을 거쳐, 1455 년 예방승지에 임명된다. 이 1455 년 수양대군이 사신으로 명나라에 갈 때 신숙주가 같이 가게된다. 왕복 기간동안 두 사람이 같은 뜻을 가지게 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신숙주는 1453 년 계유정난의 1 등 공신이었으므로 언제 두 사람이 가까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456 년 성삼문은 단종의 복위를 위한 의거(義擧)가 고발되어 처형 당한다. 이 시험을 본 9 년 후이다. 나이는 38 세]
 

성삼문의 답안
    1447 년 세종 29 중시(重試)에 장원급제
 
 책문 [시험문제]
 왕[세종대왕]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
[임성삼의 주(註); 지금도 동일하다. 폐단이 없는 법은 없다.]

 후한(後漢)에서는 무사 선발시험 날에 군사를 일으킨 폐단으로 인하여 지방의 도위(都尉)를 줄이고 전차와 기병을 관장하는 벼슬을 혁파하였으며, 송 태조는 당나라 말기에 번진[절도사]이 강했던 것을 보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이 직접 관리하였다.
 그러나 후한은 병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외방이 약한 실수가 있었고, 송나라는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한 걱정이 있었다.
 
 한 문제(BC 180 - 157)는 '가의'의 말을 받아들여 대신을 예우(禮遇)하고 형벌을 가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 말류(末流)의 폐단으로 대신이 모함을 당해도 스스로 하소연할 수 없었다.
 당 태종(626 - 649)은 신하를 염치[예의]로 대하여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니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이야기할 수 있었는 데, 도리어 귀한 신하는 불려오지 않아 잃는 것이 많았다.
 
 광무제(25 - 57)는 전한에서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은 것을 거울 삼아, 삼공에게 아무 실권 없이 자리나 지키게 하고 정권을 대각[상서성, 그 당시의 비서실]에 돌아가게 하였다.
 
 예로부터 인재를 살피고 헤아려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은 어려웠다. 한, 당 이후 어느 때는 재상이 주관하거나 또는 전조[이조와 병조]가 주관하였으나, 그 득실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여기서의 인재등용은 지금으로 말하면 "인사"문제이다. 인사의 권리를 총리가 가져야 하는지, 혹은 내무부와 국방부에서 가져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위에 말한 네 가지는 모두 다스림의 도(道)와 관련이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임성삼의 주(註); 앞으로도 여러번 나오나 위의 네 가지를 다시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세종대왕께서 21 세에 왕위에 올라 29 년 동안 재위하셨을 때 위의 문제를 출제하셨다.]
 
 우리 조선에서는 고려의 사병(私兵)을 경계하여 모두 혁파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한 대신이 다시 사병의 이로움을 말했다.
 고려에서 대신을 욕보인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비록 죄과(罪過)가 있다 해도 죄를 직접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 죄를 정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죄 없이 모함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대신이 정권을 쥐고 흔든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에게 재결받도록 하여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또 말하기를 '승정원[임주;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이 가진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정방이 외람되게 인사권을 행사한 폐단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이조와 병조가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권한이 또한 크니 정방을 다시 설치하고 제조(提調; 큰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임명되어 그 관아를 다스리는 경우의 종 1 품, 또는 2 품인 경우. 정 1 품이면 도제조.)를 임시로 낙점하도록 하자는 대신이 있다.

 거론된 대신들의 네 가지 책(策)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
 
그대 대부들은 사책(史策)에 널리 통달하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깊이 밝혀, 각자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
[임성삼의 주(註); 문제가 크고 정확하다. 또한 그 당시의 실제 문제와 직접 관련이 있다.
먼저 중국의 역사적인 사실을 들고, 우리의 경우를 말했다.]
 

대책[답]
 신이 들으니, 마음은 정치를 하는 근본이고, 법은 정치를 하는 데 필요한 도구라 합니다.
 
만 가지 변화가 마음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고, 여러 정치가 마음이 아니면 행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윗사람이 된 자가 마음을 보존하고 법을 들어 정치를 한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옛날 현명한 임금은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 이와 같이 했을 뿐이었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혹시 근보가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닐까? 이와 비슷한 문제에는 모두 통용될 좋은 문장이다. 끝까지 살펴보기 바란다.
세종대왕께서는 실제적인 실천 방법에 대해 물으셨으나 근보는 임금의 마음 자세가 옳아야 한다고 처음부터 주장하고 있다.]
 
 삼가 공경히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성군(聖君)으로서 훌륭하신 선대의 임금을 계승하여 온 정성을 다해 다스리길 도모하시니 정치를 하는 근본이 이미 섰고, 정치를 하는 데 필요한 도구도 잘 시행되어 시사(時事)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한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이것이 근본적으로 근보와 신숙주의 다른 점이다. 나중에 신숙주 답안지의 마지막 부분과 비교해보자.]
 
 그런데도 오히려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구제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하시어 과장(科場)에 신들을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병을 설치하는 것, 대신을 예로 대하는 것, 정권을 나누는 것, 정방을 다시 세우는 것 이 네 가지를 질문의 조목으로 삼아 먼저 역대 정치의 득실을 말씀하시고, 다음으로 대신이 건의한 것의 가부를 물으시어 지당하게 하나로 귀결되는 의논을 듣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들이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이니 감히 비천한 회포를 다하여 고결한 물음에 만 분의 일이나마 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임성삼의 주(註); 여기까지가 도입부이다. 참으로 좋다. 일단 유려한 문장으로 질문을 정리하고 있다.]
 
 신이 엎드려 성책(聖冊)을 읽어보니,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
 후한(後漢)에서는 무사 선발시험 날에 군사를 일으킨 폐단으로 인하여 지방의 도위(都尉)를 줄이거 전차와 기병을 관장하는 벼슬을 혁파하였으며, 송 태조는 당나라 말기에 번진[절도사]이 강했던 것을 보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이 직접 관리하였다. 그러나 후한은 병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외방이 약한 실수가 있었고, 송나라는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한 걱정이 있었다.
 
 한 문제(BC 180 - 157)는 가의의 말을 받아들여 대신을 예우(禮遇)하고 형벌을 가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 말류(末流)의 폐단으로 대신이 모함을 당해도 스스로 하소연할 수 없었다. 당 태종(626 - 649)은 신하를 염치로 대하여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니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이야기할 수 있었는 데, 도리어 귀한 신하는 불려오지 않아 잃는 것이 많았다.
 
 광무제(25 - 57)는 전한에서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은 것을 거울 삼아, 삼공에게 아무 실권 없이 자리나 지키게 하고 정권을 대각[상서성, 그 당시의 비서실]에 돌아가게 하였다.
 
 예로부터 인재를 살피고 헤아려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은 어려웠다. 한, 당 이후 어느 때는 재상이 주관하거나 또는 전조[이조와 병조]가 주관하였으나, 그 득실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위에 말한 네 가지는 모두 다스림의 도(道)와 관련이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문제의 앞부분을 다시 적었다. 조선시대의 다른 사람의 과거 답안을 보아도 이런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읽음으로 질문을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신이 들으니,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二帝; 요임금과 순임금], 삼왕[三王; 하나라의 우왕, 은나라의 탕왕,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 문왕과 무왕은 부자(父子)이므로 한 임금으로 친다]은 마음을 보존하는 것으로 정치를 하는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법이 오래 되고 나서야 폐단이 생겼고 폐단이 생겨도 구제하기에 쉬웠습니다.
 
소위 '황제(黃帝), 요임금, 순임금이 일어나 그 변화에 통달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게으르지 않게 하며, 신령스럽게 교화시켜 백성으로 하여금 마땅하게 하였다[주역 계사편]'고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 후대의 임금은 마음을 보존하여 정치를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을 법에 의지하여 정치를 하니, 법에 한번 폐단이 생기면 다시 구제할 수 없어, 마침내 혼란하고 망하는 데 이르는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근보는 왕의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이 없이 일단 정치에 대한 기본 개념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청컨대, 신이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고조(BC 206 - 195)는 군국에 재관과 기사를 두고, 장안에는 다만 남북군의 숫자만 있고, 일이 있으면 새의 깃을 꽂은 격문으로써 군대를 소집하였다가 일이 끝나면 다시 혁파하였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한 고조는 필요하면 군대를 소집하였다가 전쟁이 종료되면 농사일에 돌려보내었다.]
 
무제(BC 142 - 87) 때에 이르러 비로소 남북군의 군사를 군국에게 번상(番上; 지방의 군사를 골라 뽑아 서울의 군영으로 보내는 일)하게 하였지만 장안에는 일정하게 머무는 병사가 없었습니다.
 
왕망(8 - 23)이 찬탈했을 때 도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도 위병이 이를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적의[왕망을 토벌한 사람]는 전차와 기병(騎兵)으로서 군대를 일으키고, 또한 광무제도 이통의 계책을 써서 무사 선발 시험 날을 이용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마침내 한나라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즉위 초에 군국[지방]의 도위[군 지휘관]를 줄이고 거기[병거와 기병]의 재관을 혁파하였습니다. 그 뒤로 힘센 신하가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렀으나 외방에 의탁할 만한 번진 세력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동탁이 군대를 일으켜 궁궐을 향하고, 원소와 조조가 각각 한 지역에 웅거하여 마치 자기 소유처럼 하였지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외방 병력이 강하고 중앙 병력이 약해서 일어난 폐단이 아니겠습니까?
 
 당나라 부병제[지방의 농민을 농한기에 훈련시켜 군사로 한 것]가 세 번 변하여 번진이 되었는데, 번진의 폐단이 극에 달하자 반란을 일으키는 장수와 힘센 신하가 천하에 늘어섰고, 조정의 정령이 미치는 곳이 한 곳도 없게 되어 결국 당나라는 망하였습니다.
 
 오대 말엽의 그 군신(君臣)들은 모두 번진에서 일어났습니다. 송 태조는 군대에서 지내서 그 사실을 직접 보았으므로 나라를 세운 초기에 왕심기, 석수신 등의 병권을 혁파하고, 조용히 술잔을 권하는 사이에 번진의 수백 년 폐단을 없애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에서 통제하였으니 잘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송 태조 조광윤이 자기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신하들과 술을 같이 하면서 설득시켜 모두 병권(兵權)을 반납하고 낙향(落鄕)하게 한 일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나라가 점점 쇠약해져 도적이 사방에서 쳐들어왔고, 적들의 기세가 임금이 사는 수도의 코앞에 이를 때까지 무인지경을 달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외방에 충성을 다하여 구원하는 병사가 없어, 마침내 두 황제가 북에 포로로 잡혀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후 자손이 겨우 양자강 왼쪽을 보존하고 끝내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했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후반부는 남송을 말한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해결 방안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질문에 관계된 중국의 역사적인 사실을 열거한다.]
 
 
 무릇 대신은 임금의 보좌이니, 대신이 존귀한 후에 임금의 세력도 높은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대부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았으니, 어찌 일반 서민들에게 하는 것처럼 경(얼굴에 문신을 하는 벌), 의(코를 베는 형벌)와 같은 치욕스런 형벌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한 문제는 가의가 조정에서 한 말을 받아들여 대부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았고, 당 태종은 정선과가 죄수 속에 섞여 나가는 것을 보고, 마침내 삼품(三品)이상의 대신은 일반 죄수와 더불어 함께 불러들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대신을 예로서 대하는 아름다운 뜻이나, 그 말류의 폐단으로 주아부, 소망지, 유계, 장량(張亮; 당태종 때 사람, 한고조의 신하가 아님) 등이 원망을 품고 죽어 갔습니다. 어느 때는 대신으로 하여금 아무 하소연도 못하게 하고, 어느 때는 귀한 신하로 하여금 불려와 정황을 설명하지도 못하게 하였으니, 그 잃는 것이 또한 많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역시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도 새로운 대책을 논하는 일이 없이 과거의 일만을 설명하고 있다.
위에 적은 일 정도는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단지 문장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는 내 능력으로 판단하지 못한다.]
 
 정권은 임금의 큰 권한이니 하루라도 남에게 빌려 줄 수 없습니다. 전한(前漢) 말에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여 태아(太阿; 중국 고대의 보검)를 거꾸로 잡아 [모반하여], 왕망이 끝내 작은 국량과 하찮은 재능으로 한나라의 정(鼎)을 몰래 옮겼습니다[나라를 빼앗았습니다].
 
 광무제가 그 폐단을 통렬히 경계하여 삼공의 권한을 없애고 정권을 대각[임주; 비서실]에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신하로 하여금 머리를 움츠리고 방관하게 하는 것은 임금이 대신을 신임하는 뜻이 아닙니다. 정권이 조정에 있으면 천하가 편안하고, 정권이 대각에 있으면 반드시 환관에게 돌아가고, 환관에게 돌아가면 조정이 혼란해집니다. 이것은 광무제가 눈앞의 잘못된 것을 경계하다가 후일의 걱정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현재 미국에서도 대통령 비서실과 행정부의 힘이 대통령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군자를 등용하면 나라가 다스려져 편안해지고, 소인을 등용하면 위태로워져 망합니다. 사람을 쓰는 것은 국가의 큰 권한이니 그 쓰고 버리는 기틀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재상에게 맡기는 것은 괜찮으나, 자격과 이력을 따져 서열을 매기는 것과 같은 자질구레한 일은 재상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니 전조에 맡기는 것이 좋습니다. 역대 임금이 두 가지 일을 모두 재상에게 맡기니 재상이 그 노고를 이기지 못하고, 두 가지 일을 오로지 전조에게 맡기니 전조에 권한이 편중되었습니다. 두 가지가 모두 그 마땅함을 잃었으니 후대 사람의 비웃음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 또한 어찌 괴이하겠습니까?
[임성삼의 주(註); 여기서 처음으로 근보의 답이 나온다. 결국 공무원의 인사권을 재상과 이부, 형부에 나누자는 의견이다. 세부적인 사항의 작성은 이부와 형부에서 작성하고 그것을 보고 결정하는 것은 재상이 하는 것을 제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제안의 실효성은 잘 모르겠다. 결국 조선시대에는 인사권을 이조와 형조에 맡겨 당파싸움이 여기서 일어나게 된 것은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싸움의 원인을 생각하자.]
 
 무릇 이 여러 임금은 모두 삼대[하, 은, 주 세 왕조] 이후에 크게 공적이 있는 군주입니다. 그들이 만든 법이 어느 때는 취할 만할 것이 있으나, 끝내 두 황제와 삼왕의 정치를 이루지 못한 것은 마음을 보존하는 것으로 정치를 하는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데에서 오는 변통이었습니다.
 
 맹자께서 "나는 요순의 도가 아니면 감히 임금 앞에서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고 하였으니, 신도 감히 여러 임금의 일을 전하께 아뢸 수 있겠습니까?

[임성삼의 주(註); 처음부터 지금까지 마음을 보존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 분의 일생이 이와 같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질문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답하지 않았다. 여기까지의 내용으로는 합격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이 엎드려 성책(聖冊)을 읽어보니,
" 우리 조선에서는 고려의 사병(私兵)을 경계하여 모두 혁파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한 대신이 다시 사병의 이로움을 말했다.
 고려에서 대신을 욕보인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비록 죄과(罪過)가 있다 해도 죄를 직접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 죄를 정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죄 없이 모함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대신이 정권을 쥐고 흔든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에게 재결받도록 하여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또 말하기를 '승정원이 가진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정방이 외람되게 인사권을 행사한 폐단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이조와 병조가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권한이 또한 크니 정방을 다시 설치하고 제조(提調; 큰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임명되어 그 관아를 다스리는 경우의 종 1 품, 또는 2 품인 경우. 정 1 품이면 도제조.)를 임시로 낙점하도록 하자는 대신이 있다.
 거론된 대신들의 네 가지 책(策)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사병(私兵)을 두는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기"에 "무기, 갑옷, 투구 등 병장기를 사가(私家)에 보관하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임금을 위협한다는 것을 일컽는 것으로 신하에게 사병이 있으면 점차 반드시 그 임금을 위협하는 데 이른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고려말에 대신과 병권을 관장하는 자가 각각 도당(徒黨)을 심어 놓고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통치권을 빼앗아 마침내 나라를 위태롭게 하였습니다.
 우리 조선 초기에도 종실과 대신이 여전히 병권을 관장하였고, 이 때문에 부모 형제 사이가 서로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 때문에 공훈이 있는 신하가 좋은 끝맺음을 얻지 못했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을 겪은 후에 병권을 거두어들이고 삼군부[조선 초기 군무를 통괄하던 관청]에 패기[사병에 소속한 군인들의 군적을 기록한 장부]를 바치게 하였습니다.
 
나라에 정벌할 일이 있으면 장수를 보내 군대를 거느리게 하고, 일이 끝나면 병권은 다시 관(官)에 돌려보내고 장수는 사저에 돌아가니, 바로 옛날에 관리로서 장수를 삼고 백성으로 병사를 삼는 뜻입니다. 어찌 다시 사병을 두어 지나간 잘못을 되풀이하려 하십니까?

[임성삼의 주(註); 사병에 대해 제대로 정리된 답안이다. 간결하면서 정확한 내용이나 사병을 기르자고 주장한 사람은 어떤 의견이었는지에 대한 내용과 그 비판이 없다. 그 대신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인가?]
 
 
 대신을 예(禮)로 대우하는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용"에 '구경(九經; 아홉가지 떳떳한 법)으로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여, 대신을 공경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진실로 대신은 임금의 팔과 다리로 하늘이 부여한 직위를 같이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대신하는 바이니 그에게 불경할 수 있겠습니까? 고려 때 간사한 소인들이 일을 꾸며 임금을 어둡게 가리고 대신을 천시하고 욕되게 하여, 때로는 먼 땅에 쫓아내거나, 혹 사형시며 시신을 여러 사람이 보도록 거리에 널어놓았으니, 결국은 갓과 신발을 뒤바꾸어 놓은 꼴이 되었습니다.
 
 공민왕(1352 - 1374) 때는 요망한 중 신돈이 권세와 재물을 마음대로 주물러 하루에도 명망 있는 대신을 10여 명씩 쫓아내고, 심지어는 임금의 명령이라 속이고 유숙을 교살하기까지 하였으나, 훈구대신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한(恨)을 삼켰습니다. 이후로 거의 한 해도 거른 적 없이 여러 차례 커다란 옥사(獄事)가 일어났으니, 대신이 당한 곤란과 재앙으로 입은 불행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선에서는 여러 훌륭한 임금님이 대대로 이어, 아랫사람 대접하길 공손하게 하고, 대신을 존경하여 예로써 대하였습니다. 비록 불행하게 죄에 빠지더라도 직접 죄를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써 죄를 정하게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심문하고 난 뒤에 의금부에 내려 다스리게 하되, 수갑이나 오랏줄을 풀어 주고 정실(正室)에 거처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날에 대신이 음란하여 남녀 문제를 분별없이 하면 더럽다고 말하지 않고, "유박(유箔; 남녀가 대면할 때 그 사이에 드리우는 발)을 제대로 드리우지 못했다"고 말하며,
나약하고 능력이 부족하여 임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나약하다고 말하지 않고, "대신이 거느리고 있는 아랫사람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뜻이니, 어찌 미리 죄 없이 무고함을 입어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까?
[임성삼의 주(註); 정통적인 대답을 하였다.]
 
 정권(政權)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려 때는 권신(權臣)이 정권을 제멋대로 휘둘러 강조가 목종(997 - 1009), 정중부가 의종(1146 - 1170)에게 한 처사에서 보듯이, 나라가 그들의 손아귀에 있고 임금을 바둑이나 장기처럼 마음대로 움직였습니다. 이로부터 권력이 아래로 이동하여 임금은 허울 좋은 이름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조일신, 김용(두 사람은 공민왕 때 권력을 잡았었음)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임금의 권한을 훔치고 농락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고, 임견미 염홍방에 이르면 뇌물이 폭주하고 민전(民田)을 빼앗아 이들의 부(富)가 나라보다 많았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의 결재를 받게 해서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게 한 것은 대개 이러한 폐단을 경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육조와 여러 관서의 크고 작은 일을 반드시 먼저 의정부의 가부(可否)를 거친 뒤 승정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승정원은 단지 출납만을 관장하나 미처 의정부에서 의논하지 못한 것은 임시로 아뢰어, 혹 승정원이 가부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한두 가지 세세한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 중대한 일 같으면 후에 반드시 의정부에 보고하여 알게 합니다. 이러하니 승정원의 권한이 아주 큰 것은 아닙니다.
[임성삼의 주(註); 질문에 대한 답이기는 하나, 역시 정석(定石)적인 답이다.]
 
 
 정방(政房)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려 때에는 진양공 최충헌 부자가 4 대를 이어서 국가를 제멋대로 휘둘렀습니다. 그때 정방을 처음으로 만들고, 공공 관청을 개인 것처럼 여겨 젖내나는 자제를 정방의 승선으로 삼고, 당류(黨類)를 끌어들여 대각에 늘어놓게 하니, 관직을 임명한 것이 열흘만에 100여 개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정방의 이름은 어느 때는 혁파되었다가 다시 회복되었다가 하였는데, 그 말세에 이르러 먹과 책으로 정무를 처리한다는 비난을 받기에 이르니 그 외람됨이 극에 달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정방을 설치하지 않고, 문무 관직을 선발하는 일을 모두 이조와 병조에 맡긴 것은 이런 폐단을 경계한 것입니다. 관리를 선발할 때 하는 일은 여러 관청의 공로와 잘못을 고찰하여 벼슬아치의 위계를 올리고 내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의정부의 한 사람이 관리를 선발하는 관직을 겸하여 전체를 총괄하여 이조와 병조를 견제하고 있습니다. 또한 비록 작은 일이라도 감히 전조에서 독자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모두 아뢰어 처리하고, 큰 일은 모두 의정부의 의견을 들어 처리합니다. 따라서 전조의 권한이 막중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 어찌 정방을 다시 설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임성삼의 주(註); 확실하게 정방에 대해 반대하셨다. 역시 정방의 장점에 대한 것은 전혀 언급이 없다.]
 
 
 아아! 국가는 한 사람으로 주인(임금)을 삼고, 임금은 한 마음으로 주인을 삼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국가를 보면 국가는 지극히 크고 한 사람은 지극히 적어, 적은 것으로 큰 것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지만, 한 마음으로서 국가를 보면 국가가 비록 크지만 임금의 마음이 오히려 크므로, 큰 것으로 큰 것을 움직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이러하니 천하와 국가라는 큰 것을 가진 사람이 그 마음을 크게 하는 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직 밖으로 표현되기 전에 본심(本心)을 보존하고 기르며, 바야흐로 싹트는 때에 마음을 살피면, 온갖 일이 지극히 번잡하더라도 하나 하나 잘 다스릴 수 있고, 백관들이 비록 많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씩 부리는 이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어느 것인들 임금님 마음으로 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요, 순임금이 삼가고 두려워하며, 탕왕이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문왕이 공경하고 삼간 것이 모두 이 마음입니다.
 
 아아! 이 마음을 잡으면 보존하고 버리면 없어지나니, 마음을 보존하고 기르지 않을 수 없고, 그 뜻을 성실히 하고 앎을 지극하게 하는 데 마음을 성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학"에서는 이 마음으로 국가와 천하의 기틀을 삼았고, 동중서는 이 마음으로 조정 백관의 근본을 삼았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이제 삼왕의 마음으로 전하의 마음을 삼으면, 이제 삼왕의 정치를 이룰 수 있고, 앞으로 네 가지 법에서도 한, 당 이후에 있었던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반드시 법을 고쳐야만 지극한 정치[지치(至治)]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오늘의 법을 지키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임성삼의 주(註); 질문을 넘어서서 질문의 본질을 꿰뚫고, 올바른 마음을 강조하며 자기의 주장을 말했다. 이것이 장원급제한 참 이유일 것이다.]
 
 공자께서 "이 나라에 살면서 함부로 대부를 그르다고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으니, 신이 대신의 계책에 대하여 어찌 감히 가볍게 의논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임금께서 하문하셨으니 신은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아직 나이 어린 사람으로써 큰 일에 대해 말하였으니 겸손함을 보여야 한다.]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그대 대부들은 사책에 널리 통달하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깊이 밝혀, 각자의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변변치 못한 학식으로 어찌 그것을 알겠습니까마는, 혹 망령되게 지난 일을 들은 바 있고, 혹 망령되게 오늘날 폐단을 본 바 있으니, 어찌 한두 가지 아뢸 수 있는 것이 없겠습니까? 짧은 시간이라 마음에 품은 바를 다하지 못하고 대략 대답하여 황공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전하께서 재량하옵소서. 신이 삼가 대답합니다.
 
[임성삼의 이야기; 근보 성삼문의 이 답안은 주어진 문제에 대해 정밀하고 정확하게 대답하였다고 말하기 어렵다. 또한 현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답안이 장원에 뽑힌 이유를 생각하며 다음의 신숙주의 답안을 읽어보자.]
 

성삼문 成三問 1418∼1456(태종 18∼세조 2)   한메 디지탈 백과사전
 
조선 초기 문신.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본관은 창녕(昌寧).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생.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도총관 승(勝)의 아들이다.
 
1438년(세종 20)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47년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1442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개(李塏) 등과 이를 도왔으며, 명(明)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音韻)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하고 돌아와 46년 9월 29일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공헌하였다.
 
54년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이어 예조참의를 거쳐 55년 예방승지가 되었다. 그해 수양대군(首陽大君;뒤의 세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선위(禪位)를 강요하여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朴仲林)·박팽년·유응부(兪應孚)·허조·권자신(權自愼)·이개·유성원(柳誠源) 등을 포섭하여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하면서 거사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56년(세조 2)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원래는 아버지 승을 비롯한 무신들에게 운검(雲劒)으로 세조의 뒤에 섰다가 세조를 제거하도록 계획하였으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의 시립(侍立)이 폐지되자 그날의 거사는 일단 취소되고, 훗날 세조가 친히 거동하는 관가(觀稼) 때로 미루어졌다.
 
이와 같이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하였던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를 하여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신하들의 불충을 꾸짖었다. 그달 8일에 아버지 승과 이개·하위지(河緯地)·박중림·김문기(金文起)·유응부·박정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하였다. 그 뒤 1691년(숙종 17) 신원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무덤은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고 장릉(莊陵;端宗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매죽헌집》이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
 

신숙주의 답안
1447 년(세종 29 년) 중시에 을과급제
[임성삼의 주(註); 갑과는 3 사람이고, 앞의 성삼문은 이 갑과 중의 1 등이었다. 을과는 7 사람으로 신숙주는 을과의 몇 번째였는지는 모르겠다. 필원잡기(7 번째 책소개)를 쓴 서거정은 을과의 1 등이었다. 병과는 28 - 33 인을 뽑았다.]
 
 책문
 왕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임성삼의 주(註); 앞의 문제와 동일하다. 두 번 나왔으나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

 후한(後漢)에서는 무사 선발시험 날에 군사를 일으킨 폐단으로 인하여 지방의 도위(都尉)를 줄이거 전차와 기병을 관장하는 벼슬을 혁파하였으며, 송 태조는 당나라 말기에 번진[절도사]이 강했던 것을 보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이 직접 관리하였다.
그러나 후한은 병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외방이 약한 실수가 있었고, 송나라는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한 걱정이 있었다.
 
 한 문제(BC 180 - 157)는 가의의 말을 받아들여 대신을 예우(禮遇)하고 형벌을 가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 말류(末流)의 폐단으로 대신이 모함을 당해도 스스로 하소연할 수 없었다. 당 태종(626 - 649)은 신하를 염치로 대하여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니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이야기할 수 있었는 데, 도리어 귀한 신하는 불려오지 않아 잃는 것이 많았다.
 
 광무제(25 - 57)는 전한에서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은 것을 거울 삼아, 삼공에게 아무 실권 없이 자리나 지키게 하고 정권을 대각[상서성, 그 당시의 비서실]에 돌아가게 하였다.
 
 예로부터 인재를 살피고 헤아려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은 어려웠다. 한, 당 이후 어느 때는 재상이 주관하거나 또는 전조[이조와 병조]가 주관하였으나, 그 득실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위에 말한 네 가지는 모두 다스림의 도(道)와 관련이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조선에서는 고려의 사병(私兵)을 경계하여 모두 혁파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한 대신이 다시 사병의 이로움을 말했다.

 고려에서 대신을 욕보인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비록 죄과(罪過)가 있다 해도 죄를 직접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 죄를 정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죄 없이 모함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대신이 정권을 쥐고 흔든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에게 재결받도록 하여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또 말하기를 '승정원이 가진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정방이 외람되게 인사권을 행사한 폐단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이조와 병조가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권한이 또한 크니 정방을 다시 설치하고 제조(提調; 큰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임명되어 그 관아를 다스리는 경우의 종 1 품, 또는 2 품인 경우. 정 1 품이면 도제조.)를 임시로 낙점하도록 하자는 대신이 있다.

 거론된 대신들의 네 가지 책(策)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 그대 대부들은 사책(史策)에 널리 통달하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깊이 밝혀, 각자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
 
 
대책
 삼가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지영수성(持盈守成; 가득 찬 것을 유지하고 이룬 것을 지킴 - 창업한 것을 이어 받아 지키는 것)하시어 정사(政事)에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는 데 뜻을 두시고, 널리 뛰어난 인물을 구하려고 궁전 뜰에서 책문을 내시어 역대의 득실 자취를 헤아린 뒤 오늘의 폐단을 없애는 방법을 듣고자 하시니, 신이 비록 우매하나 생각을 말씀드려서 임금님 책문에 만 분의 일이나마 답할까 합니다.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들으니,
"창업하는 것과 수성하는 것은 형세가 다른 것으로,
창업하는 정사는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손익(損益)을 헤아리고 폐단을 없애 그치게 하며,
수성하는 정사는 옛 법을 따르고 삼가 지켜 폐단을 없애서 그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본인이 어디서 들었는지를 말하지 않고 있다. 감점의 요인이 될 수 있다. 특히 첫 머리 부분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말을 인용하는 것은 약간 문제가 있다. 그러나 문제의 요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풀어나갈 근거를 마련하였다.]
 
 예전에 한(漢)나라가 일어났을 때, 진(秦)나라의 형법이 가혹하여 예악(禮樂)이 사라졌으므로, 가의와 동중서는 이를 탄식하고 법을 세우고 제도를 고치는 것을 일삼았으며, 후대 사람은 이 두 사람의 주장을 듣고는 제왕의 다스림은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망령되게 고쳐서 임금을 현혹시키는 것이 어찌 수성하는 도(道)이겠습니까?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후한(後漢)에서는 무사 선발시험 날에 군사를 일으킨 폐단으로 인하여 지방의 도위(都尉; 군사 담당관)를 줄여 전차와 기병을 관장하는 벼슬을 혁파하였으며, 송 태조는 당나라 말기에 번진[절도사]이 강했던 것을 보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이 직접 관리하였다. 그러나 후한은 병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외방이 약한 실수가 있었고, 송나라는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한 걱정이 있었다.
 
 한 문제(BC 180 - 157)는 가의의 말을 받아들여 대신을 예우(禮遇)하고 형벌을 가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 말류(末流)의 폐단으로 대신이 모함을 당해도 스스로 하소연할 수 없었다. 당 태종(626 - 649)은 신하를 염치로 대하여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니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이야기할 수 있었는 데, 도리어 귀한 신하는 불려오지 않아 잃는 것이 많았다.
 
 광무제(25 - 57)는 전한에서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은 것을 거울 삼아, 삼공에게 아무 실권 없이 자리나 지키게 하고 정권을 대각[상서성, 그 당시의 비서실]에 돌아가게 하였다.
 
 예로부터 인재를 살피고 헤아려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은 어려웠다. 한, 당 이후 어느 때는 재상이 주관하거나 또는 전조[이조와 병조]가 주관하였으나, 그 득실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위에 말한 네 가지는 모두 다스림의 도(道)와 관련이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들으니, "군사력은 중앙이 약하면 외방이 강하고, 외방이 약하면 중앙이 강하니, 이것이 고급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라고 합니다.
군사력이, 중앙이 약하고 외방이 강한 시대는 전한(前漢), 당과 오대 말엽이고, 외방이 약하고 중앙이 강한 시대는 후한과 조송[임주(任註); 조광윤의 송, 당송 팔대가라고 할 때의 송나라]입니다.
 전한은 외방에 도위, 전차와 기병의 재관을 두어 울타리로 삼았으니, 외방의 병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쇠약해지자 동군의 태수인 적의가 무사 선발시험에서 전차와 기병을 훈련시켜 군현에 격문을 돌렸으며, 이통은 광무제에게 군대를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는데 또한 무사 선발시험하는 날이었습니다. 대오(隊伍)의 선두에 서 있는 대부와 아랫벼슬아치를 위협하여 그것으로 대중을 호령하고자 하였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시험 문제의 주제에 대해 일반적인 법칙을 만들고, 그에 대한 실제 예를 들었다.]
광무제가 중흥하자, 그 폐단을 익히 알아 재위 6 년에 군국의 도위를 없애고, 7 년에 전차와 기병의 재관을 혁파하고, 9 년에 관중의 도위를 없앴으니 외방의 병력이 강한 폐단을 혁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쇠약해지자 외방 번진의 구원이 없고, 힘센 신하들이 거리낌없이 정치를 마음대로 휘둘렀습니다. 그 후 비록 자사(刺史)를 고쳐 주목(州牧)을 두었으나, 한나라는 결국 셋으로 나뉘고 말았습니다. [임주; 삼국지의 시대가 된 것임]
한 가지 폐단을 없애기 위해 너무 심하게 고쳤기 때문에 또 다른 폐단이 생긴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신숙주가 열심히 공부한 것이 보이는 대목이다. 광무제 재위 몇 년에 어떤 조처를 취한 것인가를 명확히 알고 있다.]
 
 당과 오대 말엽에 외방 병력이 강한 폐단이 극에 달해, 번진이 제멋대로 날뛰어 넷으로 나뉘고 다섯으로 쪼개져 끝내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송 태조는 군대에서 지냈으므로 그 폐단을 잘 알았습니다. 즉위하자 조보의 계책을 받아들여 술 마시는 자리에서 부드럽게 장수들의 군사권을 약화시키고, 왕심기 등의 병권을 빼앗아 수백 년 간 이어온 번진의 폐단을 제거하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에서 관리하였으니, 외방의 병권이 강한 폐단을 혁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여기의 '조보'는 전에 소개한 다음의 말을 한 사람이다.(21 번째 책소개; 논어 전반부)
 
臣有 論語一部 以 半部 佐太祖 定天下 以半部 佐 陛下 致太平
신유 논어일부 이 반부 좌태조 정천하 이반부 좌 폐하 치태평
"저는 논어 한 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반권으로 태조[여기의 송 태조]를 도와 천하를 평정했으며,
나머지 반권으로 폐하를 도와 천하를 안정시켰습니다."
 
전에 약속했던 대로 논어의 나머지 반 권도 곧 여러분에게 소개하려 한다.]
 
그런데 나라가 쇠약해져 구적[여진족]이 침범하매 강한 울타리의 보호가 없으므로, 군현이 뿔뿔이 흩어져 맥을 못 추었습니다. 금(金)나라 사람이, 무인지경을 달려온 것처럼, 남쪽으로 내려온 지 며칠만에 도성 아래에 이르렀고, 순식간에 두 황제가 북으로 잡혀갔으며, 도망가 숨을 겨를도 없어 겨우 강동(江東)만 보존하고 마침내 떨쳐 일어나질 못했으니, 이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왕망(8 - 23)이 찬탈하여 법령을 까다롭게 만들어 손만 까닥 흔들어도 금령에 저촉되니 모두 일어나 도적이 되었고, 더구나 사람들은 다시 한나라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이것이 오로지 외방의 병력이 강한 죄뿐이겠습니까? 휘종(1101 - 1125)과 흠종(1126) 때 채경이 재상이 되어 새파란 애송이를 줄줄이 장수로 세워 방자하게 강한 적을 건드리고도 오히려 스스로 돌이킬 줄을 몰랐으니, 설령 병력이 약하지 않았더라도 어찌 쇠미해지지 않았겠습니까?
[임성삼의 주(註); 앞의 답안에 비하여 내용이 자세하다. 여기의 채경은 "수호지"에서 나오는 그 인물이다.]
 
 또 임금은 대신을 예로 높여 공경히 존중해야 하니 어찌 일반 서민들처럼 경, 의, 곤( ; 머리 깎는 형벌), 태(笞; 볼기 칠 태)를 내리겠습니까?
이 때문에 가의가 대신을 예에 합당하게 공경할 것을 정성껏 아뢰었고, 한 문제는 대신들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당 태종이 죄수를 불러들여 심리한 적이 있는데, 기주자사 정선과에 미치자 태종이 말하길, "선과는 관품이 낮지 않은데, 어찌 다른 죄수들과 같은 대오 속에 있을 수 있는가?"하고 묻고는 마침내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습니다. 호인이 이를 논하여 말하길, "신하를 염치의 도로 대우하는 것은 얻었으나,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하소연할 수 있는데, 귀하고 가까운 신하들은 도리어 불려오지 않아 죄 없이 모함을 당하고 원통하게 누명을 써도, 스스로 진달할 길이 없으니 그 폐단 또한 크다."고 하였습니다.
 그후 소망지, 양운, 유계, 장량의 일은 모두 사람들 마음을 찜찜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대신에게 원통함이 있어도 고할 기회를 없게 하여 존중한다는 것이 도리어 해치는 것이 되었으니, 이 어찌 대신을 공경하고 중히 여기는 뜻입니까?
 
 신은 가의가 대신에게 형벌을 가하지 말도록 아뢴 것은 옳다고 생각하나 자살하는 단서를 열게 한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태종이 대신을 일반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게 한 것은 옳으나 어찌 따로 불러들이지 않은 것입니까?
[임성삼의 주(註);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 된다.]

서산 진씨는 말하기를 "대신이 죄가 있으면 자살을 하게 하여 참으로 오랏줄로 묶이고 매질을 당하는 치욕을 면하게 했으나, 그 폐단은 대신이 죄 없이 모함을 당해도 감히 스스로 하소연하지 못하고 아무 변명도 못하고 죽게 한 것이니, 삼대에는 분명 이와 같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권은 임금의 큰 권한이니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한 말에 태아[칼 이름]를 거꾸로 잡고 힘센 신하들이 권력을 주물러서 왕망에 이르러서는 작은 국량과 하찮은 재능으로도 힘들이지 않고 한나라의 정(鼎)을 옮겼습니다. 그 후 광무제가 중흥하자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었던 것에 분개하고 깊이 생각하여 원대한 계책을 세워 여러 장수를 모두 후(侯)로 봉하되 일은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삼공(三公)의 권한을 제한하고 모든 권한을 총괄하였으니, 스스로 전대(前代)의 폐단을 모두 없앴다고 여겼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대신에게 믿음으로 맡기는 것이 고금의 통의(通義)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이러면 대신이 왕망처럼 나라를 빼앗을 수 있다. 이 주장을 어떻게 뒷받침하는지 살펴보자.]
어찌 삼공으로 하여금 자리만 갖추게 하고 도리어 대각에게 임금의 권한을 잡게 할 수 있습니까?
환관의 권세가 성하여 당고의 화(禍)[후한 환제 때 환관들의 정치 농단을 막으려다가 오히려 신하들이 벌을 받은 것]가 일어났으나, 삼공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방관만 하였고, 감히 누구라도 어떻게 조치하지 못하는 번왕(藩王)과 여러 장수들로 인하여 한나라가 결국 망하였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위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좋은 논리이다. 모두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선유(先儒; 과거의 유학자)가 이에 대해 논하기를, "굽은 것을 고치려다 바른 것을 지나쳤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올바른 지적입니다.
 
 사람을 쓰는 것은 나라의 큰 권한이니, 인재를 뽑는 권한을 맡기는 것은 살피셔야 합니다.
재상에게 맡기는 것이 마땅하되, 자격과 이력을 따져 서열을 매기는 것은 재상을 번거롭게 하므로 적절하지 못합니다. 서열을 매기는 것은 전조에 맡기는 것이 마땅하되, 인재를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까지 모두 전조에 맡겨서는 안됩니다.
한, 당에서 역대로 어느 때는 재상에게 맡겼다가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려도 그 번거로움을 감당하지 못했고, 어느 때는 전조에 맡겼다가 권세가 편중되어 체통을 잃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후대 사람의 논박을 면하지 못합니다.
[임성삼의 주(註); 인사권을 둘로 나누자는 의견이다. 재상을 신임하여 인사권을 주되 서열을 매기는 것은 다른 곳에서 한다. 앞의 논리와 일치한다. 근보 성삼문도 이와 비슷한 주장이었으나 신숙주의 주장이 더 명쾌하다.]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 우리 조선에서는 고려의 사병(私兵)을 경계하여 모두 혁파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한 대신이 다시 사병의 이로움을 말했다.
 고려에서 대신을 욕보인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비록 죄과(罪過)가 있다 해도 죄를 직접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 죄를 정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죄 없이 모함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대신이 정권을 쥐고 흔든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에게 재결받도록 하여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또 말하기를 '승정원이 가진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정방이 외람되게 인사권을 행사한 폐단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이조와 병조가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권한이 또한 크니 정방을 다시 설치하고 제조(提調; 큰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임명되어 그 관아를 다스리는 경우의 종 1 품, 또는 2 품인 경우. 정 1 품이면 도제조.)를 임시로 낙점하도록 하자는 대신이 있다.
 거론된 대신들의 네 가지 책(策)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들으니 "천운(天運)은 순환하여 비괘가 극에 달하면 태(泰)괘가 온다."고 하였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주역에 나오는 말로 논리를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는 주역에 나온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으니 출처를 적지 않았다.]
 우리 동방은 고려말부터 나라가 어지럽고 정치가 어두워졌는데, 우리 태조(1392 - 1398)께서 하늘에서 내려 준 성인의 덕을 갖춤으로써 운수에 부응하여 나라를 열었습니다. 뒤이어 여러 훌륭한 임금들이 옛날을 헤아리고 오늘을 살피어, 나쁜 법을 모두 혁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폐단이 없는 법이란 없으므로, 진실로 성책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하나하나 진술해 보겠습니다.
 
 사병을 혁파한 것은 고려의 권신들이 제멋대로 날뛴 폐단을 경계한 것입니다. 사병의 설치는 처음에 서울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호위하고자 한 것인데, 그 폐단으로 임금이 약해지고 신하가 강해져 갓과 신발을 바꾸어 놓은 꼴이 되어 사병을 혁파해야만 했습니다.
태평한 세월이 오래 지속되니 군사의 방비가 해이해지고, 장수가 병사를 알지 못하고 병사가 장수를 알지 못하면, 갑자기 군사를 쓸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사병을 설치하자는 요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다시 사병을 키우자는 의견이 나오게 된 이유를 정확히 말하였다.]
 
 대신이 죄가 있어도 직접 대놓고 캐묻지 않은 것은, 고려에서 대신을 낮추고 욕보인 폐단을 경계한 것입니다. 고려에서는 대신에게 사정없이 볼기를 치고, 죄인을 죽이는 데 쓰는 도끼와 쇠모탕으로 죽이니, 이 어찌 예로써 높이고 공경히 존중하는 뜻입니까? 이 때문에 대신을 욕보이는 것을 혁파하지 않을 쑤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심나는 옥사는 밝히기 여려운데다 간사함이 날로 늘어나, 여러 증거로 죄를 결정해도 반드시 애매 모호하여 원통하게 죄를 입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죄 없이 모함을 받는다는 탄식이 있게 된 것입니다.
 
 대신이 정사를 제멋대로 하는 것을 혁파한 것은 고려의 대신이 외람되이 권력을 남용한 폐단을 경계한 것입니다.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의정부가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임금께 아뢰어 재가를 받도록 했는데,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가 권력을 잡게 되어 권한이 승정원[왕명의 출납을 맡은 기관]에 돌아가니, 이 때문에 승정원의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정방을 혁파한 것은 고려에서 인사권을 외람되게 행사한 폐단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조선에서 이조와 병조가 그 권한을 나누어 관장하여 인물을 등용하거나 내치도록 하였는데, 화복(禍福)을 제멋대로 주물러 권세가 너무 크니, 이 때문에 그 권세가 너무 크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여기까지 질문을 다시 분석하였다. 그러나 특별한 점은 없다.]
 
 고려의 잘못된 것을 거울 삼아 새로 개혁한 네 가지는 폐단이 없을 것 같은 데도 폐단이 생겼고, 개혁한 네 가지에 대한 대신의 이견(異見)은 온당한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온당치 못합니다.
 신이 가만히 네 가지 폐단을 거슬러 올라가 생각하니, 반드시 그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네 가지 폐단을 없애는 방법은 사람을 임용하는 데 있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네 가지 질문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을 제시한다.]
 
대체로 법에 폐단이 없을 수 없는 것은 오성육률[임주(任註); 음악을 말한다]에 음탕한 음악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선왕은 대략적인 것만 남겨 두고 사람에게 맡기어, 진실로 백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면 억지로 없애지 않았으니, 전부를 변경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
 
 사병을 폐단을 혁파하는 것은 후한의 광무제와 송 태조가 줄기를 강하게 하고 가지를 약하게 한 뜻을 본받되, 항상 슬기롭게 사기(士氣)를 진작시켜 해이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대신을 낮추고 욕보이는 폐단을 혁파하는 것은 당 태종과 가의가 대신을 존중한 뜯을 본받되, 항상 의심나는 옥사가 있을 때는 그 애매 모호한 것을 신중하게 살펴 간사함이 날로 불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정사를 제멋대로 결정하는 폐단을 혁파하려면 크고 작은 일을 반드시 의정부를 거치게 하고, 승정원은 삼가고 경계하도록 하십시오. 다만 오늘날의 제도에 견주어서 광무제가 삼공은 자리만 지키고 정권은 대각에 돌아가도록 한 것처럼 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정방의 폐단을 혁파하려면 이조와 병조가 인사권을 주관하고, 의정부 역시 관리를 등용하거나 내치는 권한에 참여하도록 하십시오. 다만 오늘날의 제도에 견주어서 믿음으로 맡기어 후대 사람의 비판을 면하는 것이 옳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온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네 가지 큰 질문에 위와 같이 간단히 대답하였다. 답안의 중심이다. 어딘지 허전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아무리 부피가 많은 책이라도 핵심은 간단한 법이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져도, 그 근본은 반드시 사람을 임용하는 데 있습니다.
적임자가 있는데 쓰지 않거나, 쓰되 그 말을 행하지 않거나, 그 말을 행하되 그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비록 날마다 그 법을 백 번 바꾼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신은 네 가지 폐단을 구하는 것은 사람을 쓰는 데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밑줄친 부분은 '중용'의 내용을 확대한 것이다. 신숙주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의 임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말하지는 않았다.]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그대 대부들은 사책에 널리 통달하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깊이 밝혀, 각자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고루하니, 이 짧은 시간에 품은 생각을 어찌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임성삼의 주(註); 아는 것이 많은데 시간이 없다는 의미인데 정작 위의 답은 중요한 부분이 상세하지 못하고 매우 짧다.]

신이 들으니, 향리에서 추천하는 법을 폐지한 이후에 과거 제도가 생겼다고 합니다.
한 무제가 처음 천하에 조서를 내려 어질고 바르며 곧은 말로 간쟁하는 선비를 추천하라고 하니, 동중서의 무리가 충직한 말과 곧은 의논으로 책문에 답한 것이 지금까지 전해 옵니다.
그러니 예나 지금이나 책문을 내어 선비에게 물어 마음껏 토로하는 언로(言路)를 연 것은, 그 당시 정치의 폐단을 듣고 세상을 구제하는 방법을 얻고자 한 것이니, 이는 다만 과거 응시자를 시험할 뿐이 아닙니다. 선비를 뽑는 데 대책(對策)으로 하는 것이 역시 좋은 법입니다.
 
 후세에 이르러, 임금은 겉치레로 옛일을 본떠 책문을 내고, 아랫 사람의 대책은 다만 문장이나 멋들어지게 만들어, 문장의 교묘함과 졸렬함을 비교하여 자신을 파는 매개로 삼으니, 이는 윗사람으로 인하여 빚어진 결과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서거정의 필원잡기에도 간혹 과거에서 문장만을 꾸미는, 과거장에서 늙은 사람이 뽑히는 경우가 있었다고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생각이다.]
 
 당 문종(827 - 840)이 천자가 문제를 내는 임시과거에서 친히 책문을 내고 유분이 허심탄회하게 답하니, 시험관 풍숙이 탄복했으나 감히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역자 주(註); 유분의 글이 당시 세력이 있던 환관의 비리를 공박하는 내용이었으므로 시험관 풍숙이 감히 뽑지 못하였다. 이 때 합격된 이태라는 사람이 말하였다. "유분이 떨어지고 우리가 합격하다니 낯이 부끄럽다."]
희녕 연간(1068 - 1077)에 왕안석이 정권을 잡았는데, 공문중이 대책에서 신법(新法; 왕안석이 마련한 법)을 문제삼자 마침내 천자가 문제를 내는 임시과거를 폐지했으니, 그 말의 곧음을 미워한 것입니다.

 말하게 하고 나서 절실한 것을 두려워하고 곧은 것을 미워한다면 어찌 허심탄회한 언로를 열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선비들이 날로 너도나도 교묘하게 속이는 데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지금 계속되는 부분은 과거시험 자체에 대한 내용이므로 어떤 문제가 출제되어도 통용되는 내용이다. 이 부분은 미리 준비가 가능하다. 앞에서 근보 성삼문께서 준비한 내용과 비교하여 보라.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주상 전하께서 친히 문제를 내어 선비들에게 물으시니, 이는 언로를 열고 오늘의 폐단을 물으셔서 이른바 세상을 구제하는 방법을 구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유분처럼 극언(極言)을 하고, 공문중처럼 신법을 논해도 당연히 받아들이려 하실 것이니 신이 감히 숨기는 바가 있겠습니까?

 오늘의 폐단 중에 이 네 가지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강이 떨치지 못하고, 조정은 날로 허물어지고, 민생은 어렵고, 하늘의 변고가 여러 차례 보이고, 풍속이 야박해지고, 탐욕스럽게 마음껏 거두고, 절의를 닦지 않고, 억울한 옥사가 넘치고, 도적이 횡횡하는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이 해가 세종 29 년인 1447 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현명하고 백성을 위한 왕 중 한 분이셨던 세종께서 29 년이나 다스린 결과를 신숙주는 이렇게 평하였다. 더욱이 신숙주는 1438 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관리에 올라 거의 10 년을 근무한 때에 이 답을 작성하였다.]
 
 신은 토붕지환(土崩之患; 흙이 무너지듯 조직이나 사물이 근본적으로 무너져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 한(漢)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앞서 말한 네 가지 폐단을 구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언로를 널리 여시어 직언(直言)을 받아들이고, 날마다 대신과 더불어 그것을 구제할 방도를 강구하여 행하시면, 사계절처럼 미덥고 금석(金石)처럼 견고해서 누적된 폐단을 구제하기 어려울까 근심하실 필요가 없을 것이니, 나라와 온 백성에게 매우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신숙주는 그 당시의 우리나라의 상황을 이렇게 비관적으로 보았으니, 그 상황을 고쳐 나라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을 지 모른다.
 6 년 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는 계유정란에 신숙주가 가담해 정난공신 1 등에 오른 것은 나라의 상황에 대한 위와 같은 인식이 바탕이 되었을 수도 있다.]
 
[임성삼의 이야기;
처음 읽은 후에는 신숙주가 더 정밀하고 좋은 답을 썼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읽어볼 때는 근보 성삼문을 장원으로 뽑은 세종대왕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이 시험은 대학입학을 위한 것이 아니고, 조선을 이끌어갈 인물에게 일종의 권위를 주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께서는 모든 일을 바른 마음을 기본으로 판단하는 인물이 나라를 이끌어가야 된다고 생각하셨음을 알 수 있다. 후일 두 사람의 행동을 보면 세종대왕이 옳으셨다.
 
그러나 신숙주가 상황을 분석하여 일을 이루는 능력이 뛰어난 것이 이 답안에서 보인다. 결과적으로 영의정까지 되어 많은 일을 하였으나 일 처리에 별로 실수가 없었다.
 
신숙주는 58 세에 죽으면서, "세상이란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을!"라고 말했다 한다. 그가 말년에 지은 시를 소개한다.(원래는 한시)
 
양덕 가는 길에 우연히 읊조린다
 
작년에 이 하나 빠지고
금년에 머리카락 한 올 세었네.
늙음을 면치 못함이야 알고 있지만
어찌 이리도 서로들 재촉하나.

분주하여 여전히 쉬지 못함은
만리 밖이 검극(劍戟)을 일삼는 탓.
공명(功名)과 업적이야 취할 바 아니지만
헛된 명성은 이미 극진했지.
바라건대 이제는 잠불(簪 ; 비녀 잠, 인끈 불; 벼슬을 말함)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우졸(迂拙; 멀 우; 작가 자신)이나 보전하리.]
 

신숙주 申叔舟 1417∼1475(태종 17∼성종 6) 한메 디지털 대백과사전
 
조선 초기 문신.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보한재(保閒齋). 본관은 고령(高靈).
 
 1438년(세종 20)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급제, 41년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42년 서장관으로 일본에 건너가 시명을 떨치고, 귀국 도중 쓰시마섬〔對馬島〕에 들러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했다. 그 뒤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유배중이던 명(明)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찾아가 음운에 관한 지식을 얻어 훈민정음 편찬에 큰 공을 세웠다.
 
 47년 집현전응교가 되었고, 53년(단종 1) 부승지가 되어 계유정란에 참여해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훈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다.
[임성삼의 주(註);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할 때 지금의 청와대 비서관이었다. 이 때의 병조판서는 정인지였다고 기억한다. 즉 수양대군은 국방장관과 대통령 비서관이 자기 편이었던 것이다.]
 
 
55년 수양대군이 즉위한 뒤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고령군에 봉해졌고, 다음해에 병조판서·대사성 등을 지냈다. 57년 우의정에 오르고 59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60년 강원·함길도의 도체찰사로서 모련위(毛憐衛)의 야인을 정벌, 62년 영의정이 되었다.
 
예종이 즉위하자 곧 원상(院相)이 되었고, 68년 남이(南怡)를 숙청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이 되었으며, 71년(성종 2)에 좌리공신 1등에 책록, 영의정에 재임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화려한 경력의 사람으로는 앞에 소개한 시가 너무 쓸쓸하지 않은가?]
 
 
72년에는 《세조실록》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탁월한 학식과 문재로써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동국정운(東國正韻)》 《국조보감》 《영모록(永慕錄)》등을 찬수했으며, 《보한재집》 《북정록(北征錄)》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사성통고(四聲通攷)》 등의 저서를 지었다. 또한 글씨를 잘 썼는데, 전하는 것으로는 《몽유도원도》의 찬문(贊文)과 해서체의 《화명사예겸시고(和明使倪謙詩稿)》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

조선 초기의 여러 사람들의 생존연대를 다시 정리해 본다.
 
태조  1335
정몽주     鄭夢周/1337~1392
정도전           1337
유관         柳寬/1346~1433           우산으로 천하가 새는 것을 막다 - 지봉의 말
하륜         1347
권근          權近/1352~1409
길재           吉再/1353~1419          정종이 내린 땅에 대나무를 심다.
안성            安省                               남길 것은 청렴 렴자
맹사성        孟思誠/1360~1438 
영락제 1360-1424                 1399 거병
황희              黃喜  1363~1452
태종              1367                         1398 왕자의 난
변계량 1369 - 1430
윤회 1380
김종서 1390 - 1453
정인지 1396 - 1478
세종  世宗/1397~1450     재위 1418∼50              53 세에 승하
정갑손   鄭甲孫/?~1451)   부들 자리에 무명 이불 - 곧은 말, 거침없는 행동
구치관  具致寬/1406~1470  세조가 말했다. "그는 나의 만리장성"
문종   文宗/1414~1452 재위 1450∼52
세조   世祖/1417~1468 재위 1455∼68            51 세에 죽음, 38 세에 조카를 퇴위시키고 13 년 재위
기건   奇虔/?~1460(정성 건) 세조가 다섯 번 찾아가 벼슬하기를 청했으나 거절, 연안 부사할 때 붕어 안먹음, 제주도에서 근무할 때 복어, 전복 안먹음
박팽년 朴彭年/1417~1456
신숙주 1417 - 1475         1438  1439   1447 급제
성삼문 1418 - 1456  1438 급제   1447 장원
 
서거정 1420 - 1488
김시습   金時習/1435~1493
남이 1441 - 1468
남효온  南孝溫/1454~1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