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프랭클린의 후회없는 생애
  대영백과사전에서 10 여 쪽에 이르는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18세기의 미국인 가운데 조지 워싱턴 다음으로 저명한 인물일 것이다." 그는 미국의 독립 시기에 활동한 워싱턴(1732. 2. 22~1799. 12. 14), 패트릭 헨리(1736. 5. 29~1799. 6. 6), 제퍼슨(1743. 4. 13~1826. 7. 4)보다 적어도 한 세대는 먼저인 사람이며 독립전쟁 당시 이미 환갑이 넘은 나이였다.
  그러나 그가 현재까지의 모든 미국인에게 준 정신적 영향은 위에 든 세 사람보다 크다고 생각한다. 이 영향은 주로 미국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는 이 책에 의한 것이다.
  프랭클린은 이 책에서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교회에 열심히 다닌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의 모든 행동은 청교도의 기본 규칙을 엄밀하게 따랐다. 청교도적인 그의 이 자서전은 그 후 미국인의 행동의 규범이 되었으며 앞으로도 상당기간은 계속 그러할 것라고 생각된다.
  그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1771 년이니 그가 65 세 되는 해였다. 이 책의 내용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청년들이 행동해야 할 바를 많이 설명한 것으로 보아 오히려 손자의 나이 사람들에게 자애롭게 삶의 방법을 일러주고 있는 느낌을 준다.
  이 책의 여러가지 이야기를 보면 그는 대단히 머리가 잘 움직이는 실용적인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후대의 링컨(1809. 2. 12~1865. 4. 15)보다 더욱 영리한 도회지의 사람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이 전기에서 "미국은 어떻게 큰 나라가 되었는가?"라는 의문을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근면에 대한 믿음, 성실성, 올바른 이익의 추구 등 자본주의가 타락하지 않고 발전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철저히 믿고 있으며 아주 평범한 말로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게 타이르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신봉(信奉)하는 사회가 부를 쌓아 자본주의를 성장시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술장사에서 시작한 케네디 일가(一家)가 미국을 일으키거나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보자. 나는 많은 수의 프랭클린 같은 사람들이 미국을 만들고 유지시켜나가는 것으로 믿고 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인 튀르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랭클린은 하늘에서 번개를 빼앗았고, 왕에게서 홀(笏)을 빼앗았다."
  삼성문화문고 103 권, p 285, 1978을 사용하였으나 다음과 같은 책이 번역되어 있다.
     프랭클린 자서전     동천사     1993 년     7000 원
     프랭클린 자서전;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을지출판사     1988 년     4000 원    
     프랭클린 자서전     범우사     1974 년     3000 원
[Benjamin Franklin 1706∼1790   백과사전에서
  미국 정치가·과학자·출판업자. 보스턴 출생. 아버지의 사업을 돕다가 형이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뉴잉글랜드 커런트》지(紙)의 발행을 도왔다.
  1723년 형과의 의견 불일치로 필라델피아로 갔다가 이듬해 런던으로 건너가 2년 후에 귀국하였다. 29년말 인쇄업을 경영하여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지를 편집, 발행하였다. 31년 조합도서관을 계획하여 도서관 발달의 선구자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을 출판, 그의 상식적이고도 재치있는 경구(警句)로 유명해졌다.
  36년부터 공적(公的) 생활에 들어갔으며, 10년 후에는 자연과학 연구에 전념하여 49년 피뢰침을 발명하였다. 52년 연을 이용한 실험을 통해 번개와 전기의 방전은 동일한 것임을 증명하여 세계의 주목을 끌었으며 이듬해 영국 왕립협회 회원이 되었다. 7 년 전쟁의 위기가 긴박해지자, 올버니회의의 대표로서 최초의 식민지 연합안을 제안하였으며, 전쟁이 일어나자 의용병의 대장이 되었다. 또한 영국으로 건너가 영주 펜과의 접촉을 가졌으며, 전후 본국과의 분쟁이 일어났을 때는 펜실베이니아 대표로서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인지조례(印紙條例)의 철폐 등 정치가로서의 수완을 보였다. 처음에는 본국과의 화해를 확신하였으나, 차차 급진화하여 귀국 후에는 제 2 회대륙회의 대표, 76년 독립선언문 기초위원이 되어 T.제퍼슨을 도왔다.
  전쟁중에는 주(駐)프랑스대사로 파리에 부임하여 미·프공수동맹 체결에 성공하였다. 85년 3차로 귀국하여 펜실베이니아 행정장관, 87년 연방헌법협의회의 주대표가 되어 만장일치의 헌법 승인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펜실베이니아주의 급진 헌법을 옹호하여 급진주의자로서의 면목 또한 잃지 않았다.]

p 1   서론
  프랭클린 자서전은 미국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는 책이다.
1. 선조의 교훈 [1771 년 저술]
p 8
사랑하는 아들에게
[임성삼의 주(註); 앞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아들에게 아버지로써 이야기하는 책이다.]
p 20
  나의 아버지는 될수록 자주 슬기로운 친구들이나 이웃과 식탁에 마주앉아 즐거운 마음으로 얘기를 나누었다. 그 때마다 어린이들의 마음을 일깨워주는 유용하고 현명한 화제들에 마음을 썼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인생의 행로에 있어서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슬기인가에 우리의 마음이 끌리게 했다.
[임성삼의 주(註); 프랭클린의 아버지가 아들들을 가르친 방법이다. 첫째가 유용성이다. 미국의 실용주의적인 면이 보인다. 둘째가 현명함이다. 셋째가 착함이다. 마지막의 슬기는 현명함과 거의 같은 의미로 본다.]
  그렇지만 식탁에 오르는 음식들에 관해선 마음을 쓰지 않았다. 간이 맞는지 안맞는지, 계절에 맞는 향미(香味)인지, 철 지난 것인지, 아니면 격(格)에 떨어지는 음식인지, 어울리는 것인지 분간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도 그런 일들에 무관심하니 장성(長成)해서도 내 식탁엔 무슨 음식이 놓이든 관심밖이었다. 그렇게 초연(超然)한 탓으로 식사를 하고 몇 시간이 지난 뒤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나는 거의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런 습관은 여행을 하다 보면 마음을 편하게 했다.
[임성삼의 주(註);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어느 나라이든 그 나라가 발전하는 시기에는 음식에 대한 위와 같은 기록이 나온다. 기원전 1 세기에 로마군이 골인을 정복할 때 배급되던 음식은 고기가 거의 배급되지 않는 소박한 음식이었고(앙드레 모로아의 프랑스사), 아랍 군대가 7 세기에 북 아프리카를 넘어 스페인을 점령할 때도 매우 간단한 음식을 먹었으며, 청나라 군사가 15 세기에 중국 대륙을 점령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13 세기의 몽고가 유럽과 아시아를 정복할 때의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도 미국의 식사는 유럽에 비해 매우 간단하고 식사 시간도 짧다.]
  나의 어머니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몸매를 하고 있었다. 10 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온통 자신의 모유(母乳)로 키웠다. 나는 양친이 세상을 떠나실 때 앓은 일 말고는 그 분들이 앓아 누워 계신 것을 본 일이 없다. 아버지는 89 세에, 어머니는 85 세에 세상을 떠났다.
[임성삼의 주(註); 프랭클린은 이것을 간단한 음식과 규칙적인 생활의 결과라고 생각하였다.]
p 27
  글을 쓰는 능력을 내가 어떻게 터득할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 이제 너에게 이야기해 주마. ...
  이 무렵 나는 "스펙테이터(Spectator)"라는 오래된 책을 발견했다. 제 3 권이었다. 도무지 전에는 본 일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사서 읽고 또 읽었다. 여간 즐겁지 않았다. 문체(文體)가 하도 우아해서, 가능하면 그것을 본받고 싶었다. 그럴 셈으로 나는 몇 페이지를 선택해서 문장(文章)마다 요점을 머리속에 새기며 적어 놓곤 했다. 며칠은 그것을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나서 책을 덮어 놓은 채, 적당한 말들로 원문(原文)의 길이만큼 요점(要點)을 각기 적어서 다시금 본문의 형태로 만들어 보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작성한 글과 원문을 비교해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고는 바로 잡을 수 있었다. ...
  얼마후 그 글을 잊어버릴 때쯤 해서 다시 그것을 원문으로 바꾸어 보았다.
[임성삼의 주(註); 지금도 이 방법을 사용하면 글을 잘 쓸 수 있게 된다.]
p 31  [형의 인쇄소에서 일하며 음식비용을 따로 달라고 하여 채식(菜食)을 하여 반을 남겼다.]
  이 돈으로 나는 책을 사는데 보태기로 했다. 하지만 좋은 점은 또 하나 있었다. 나의 형이나 그밖에 다른 사람들은 식사를 인쇄소 아닌 다른 데서 했기 때문에 나는 혼자 거기에 남아서 식사를 가볍게 얼른 해치울 수도 있었다. 그럴 때의 식사란 비스킷 한 조각, 빵 한 조각, 건포도 한 줌, 과자집에서 만든 과일 파이 한 조각, 물 한 잔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남는 시간을 공부하는데 보냈다. 먹고 마시는 일을 절제(節制)하면 두뇌도 깨끗하고 이해력도 빨라졌다. 공부는 당연히 큰 진도(進度)가 있었다.
[임성삼의 주(註); 일석 4 조이다. 돈을 아끼고, 그 돈으로 책을 사고, 산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얻었고, 적게 먹어 머리 회전이 빨라져 공부에 진도가 있었다. 이런 사람과 경쟁하여 이길 수 있을까?]
  나는 산수 실력이 부족해 어떤 경우엔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했다. 학교에 다닐 적엔 그것을 배우려고 애썼지만 두 차례나 실패를 거듭했었다. 그래서 다시 산수책을 꺼내 공부하기로 했다. 이번엔 독학으로 그것을 전부 통달(通達)할 수 있었다.
p 32
  점차 예의바른 용어들로 표현하는 습관만을 터득하게 되었다. 필경 이론(異論)이 제기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문제들에 대하여는 "분명히", "의심할 바 없이"라는 등의 표현이나 그 의견에 단정을 내리는듯한 어조는 극히 삼갔다.
  도리어 그 문제를 이러이러하게 생각하고 이해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가령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거나, "내가 혹시 틀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을 이렇게 생각하는데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습관은 내가 오래전부터 익혀온 바이지만 어떤 의견을 밀고 나가거나, 남을 설득하는 경우에는 매우 유리한 입장을 만들어 주었다.
[임성삼의 주(註); 실제로 미국 학자들과 이야기 해 보면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이 상당히 있다.]
  대화의 귀중한 목적은, 가르쳐 주고 가르침을 받으며, 또 즐겁게 하고, 설득하는 데에 있다. 내가 바라기는 선의(善意)를 가진 지식인이라면 '단정적이고 주제넘은 태도'로 인하여 선을 행하는 능력을 약화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반감을 자아내게 하고 다른 한편으론 의견을 주고 받는 즐거운 대화의 목적을 깨뜨려 버릴 것이다. 
  네가 무엇을 말하려고 할 때 단정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로 너의 생각을 밀고 나가면 반감을 사고 또 솔직한 관심을 집중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시인 포프(Pope)는 현명하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사람은 마치 가르치지 않는 것처럼 가르쳐야 한다."
"확실하더라도 주저하며 말해야 한다."
  이 구절은 다음 구절과 짝지어 붙여 놓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겸손이 부족한 것은 양식(良識)이 모자란 때문이다."
"불손한 말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겸손이 부족한 것은 양식(良識)이 부족한 때문이니."
[임성삼의 주(註); 동방예의지국의 자손들이 미국의 할아버지에게 언어 예절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p 39
  드디어 형과 나 사이엔 새로운 시비가 일어났다. ...
  형은 내가 그와 헤어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 고장의 다른 인쇄소에 내가 고용되는 것이 두려웠던지 다른 인쇄소 주인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지껄여댔다. 따라서 나에게 일자리를 주는 인쇄소는 아무 데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인쇄업자가 있는 가장 가까운 도시인 뉴욕으로 갈 작정을 했다. ... 아버지는 이제 형의 입장을 두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공개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하려고 할 것이다. ... 나는 책을 팔아 돈을 좀 장만해 가지고 배에 올랐다. 마침 바람을 잘 만나 사흘만에 뉴욕에 닿았다. 생가(生家)와는 3백 마일이나 떨어진 곳이다. 이 때 나이는 17 세. 소개장을 가진 것도 없고 그렇다고 친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호주머니엔 돈조차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아마 형에게 많이 잘 못 보인 것 같다. 너무 영리한 이유도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p 64
  빠뜨린 이야기가 있다. 보스턴을 처음 떠나올 때의 이야기다. 풍랑이 자면서 블로크 섬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은 대구 낚시를 해서 꽤 많이 잡아 올렸다. 이때까지 나는 생명이 있는 고기는 먹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고기를 낚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 일종의 살생(殺生)이라고 본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물고기도 살육(殺戮)을 정당화할만큼 우리를 상해(傷害)한 적도 없고, 또 그럴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그럴듯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전엔 물고기를 아주 즐겨 먹었으며, 더구나 프라이팬에서 그것이 뜨겁게 튀겨지는 냄새는 여간 군침이 도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잠시 나의 주의(主義)와 유혹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런데 생선의 배를 열었을 때 거기에서 대구보다 조금 작은 물고기가 나온 것을 보고 나는 비로소 생각했다.
"너도 서로 잡아먹는데, 우리가 왜 네놈을 먹지 못한단 말이냐."
그렇게 나는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대구를 기분좋게 실컷 먹었다. 가끔 생각난 듯이 채식주의로 되돌아 오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계속 생선을 먹었다.
  "이성적인 동물"이란 참 편리한 것이어서, 그가 할 생각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합당(合當)한 이유를 만들어 붙이거나 찾아내는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자기의 행동을 날카롭게 분석할 수 있는 이 능력이 후일의 프랭클린이 있게 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든 이유를 붙일 수 있다. 유태인을 수 백만 씩 죽이는 일에 종사한 사람도 역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p 82
  런던의 위츠의 인쇄소로 옮겼다. ...
  나는 물 이외에는 마시지 않았는데 50 명 가까운 다른 직공들은 대단한 맥주 고래였다. 경우에 따라서 나는 한 손에 하나씩 커다란 활판(活版)을 들고 층계를 오르내렸는데, 다른 직공들은 두 손에 하나씩 들고 다녔다. 그들은 이런 일을 몇 번 보고는 의아한 듯이 "맹물만 마시는 미국인"이 독한 맥주를 마시는 자기들보다 강하다고 했다.
  맥주집의 '보이' 하나는 직공들에게 술을 대기 위해 노상 인쇄소에 와 있었다. 인쇄일을 하는 한 친구는 매일같이 술을 마시는데, 그것도 아침 식사 전에 한 잔, 아침 식사를 하면서 치즈와 빵과 함께 한 잔, 아침과 점심 사이에 한 잔, 점심을 먹으면서 한 잔, 오후 6 시쯤에 한 잔, 일을 마치고 나서 한 잔 .... 이런 식이었다. 나는 그것이 눈에 거슬리는 악습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힘든 일을 하자면 술도 강한 것을 마실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맥주를 마셔서 생긴 체력이란 맥주의 성분인 물 속의 보리알이나 가루의 양과 비례하며, 1 페니짜리 빵 속에도 그 가루가 못지 않게 많이 들어 있으므로 물 한잔과 함께 그것을 먹으면, 맥주 한 컵을 마시는 것보다 더 센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그에게 믿게 하려고 애썼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논리가 생물학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옳은 일을 위해 사용할 때는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래도 그는 계속 마셔댔으며, 매주 토요일 저녁이면 그 광적인 액체를 마시기 위해 거의 임금에서 4, 5 실링씩 지불해야 했다. 나는 그런 일로 나가는 비용은 없었다. 그러니 이 가난뱅이 녀석들은 언제나 그 모양 그 꼴일 수밖에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지금은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잘사는 미국 백인이 많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몇 주 지나 식자(植字)부로 옮겼다. 식자공들은 새로 들어온 사람이면 술값으로 5 실링을 내놓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너무 지나친 부과(賦課)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미 인쇄공들에게 한 차례 당한 바 있어서, 주인도 일리가 있다고 하며 지불을 안해도 좋다고 했다. 나는 2, 3 주일을 그렇게 버티었더니, 결국 돌림을 받게 되어, 사소한 골탕들을 수도 없이 겪어야 했다. 가령 잠시 자리를 떠나면 활자를 헝클어 놓고, 페이지를 뒤바꿔 놓는가 하면 ,내가 하던 일을 파괴하는 등등이었다. ... 주인이 아무리 감싸주어도 스스로 호응해서 돈을 내놓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그들과 함께 계속 지낼 바에야 나쁜 관계로 맺어지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작은 일에서 끝까지 정의를 주장하여(그것도 자기에게 금전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을) 동료들과 같이 일하지 못할 정도까지 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그들과 화목한 사이가 되었고 얼마 안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나는 인쇄소의 규칙들을 합리적으로 바꾸는 문제를 제의했으며,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그 뜻을 성취시켰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직공들은 머리를 무겁게 하는 맥주나 빵과 치즈를 밀어놓고, 옆집에서 배달해 주는 것을 나와 함께 먹었다. 그것은 후추를 뿌리고, 빵을 부스러뜨려 버터를 집어넣은 뜨거운 죽을 큰 사발에 담아 주는 것이었다. 그 값은 맥주 한 잔 값인 3 페니 반이었다. 이것은 값이 싼데다가, 또 머리도 깨끗하게 해주었다.
p 106  [다시 미국으로 가서 개업하였다.]
  세상엔 어디엘 가나 까마귀 같은 친구가 있어서 불길한 소리로 울어대기 마련이다. 바로 그런 친구가 그 당시 필라델피아에도 있었다. 유명한 사람인데, 지긋한 나이에 얼굴은 이지적(理智的)인 모습을 하고 있었고, 말씨도 꽤 무게가 있어 보였다. 이름은 "새뮤얼 미클". 이 신사는 나에겐 낯선 사람으로, 하루는 문앞에 멈추어 서더니 내가 최근에 새 인쇄소를 차렸다는 바로 그 사람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나에게 유감이라고 말하며 이것은 돈이 많이 드는 사업이라 결국 밑천만 잃고 말 것이라고 했다. 또 필라델피아는 기울어가고 있고, 이 고장 사람들은 이미 파산을 했거나 아니면 거의 그런 지경에 있다는 것이다.
  새 빌딩들이 들어서고, 집세가 오르고 하는 것과는 딴판으로, 그 모든 외양(外樣)은 허황된 것이며 또 실제로 우리는 머지않아 파멸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에 나는 우울한 상태에 빠졌다. 내가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를 만났었으면, 필경 이 일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사람은 무너져가는 이 고장에 계속해 살며,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면서 몇 년째 집도 사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파멸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불길한 예언을 하고 다닐 때보다 다섯 배나 더한 값을 주고 집을 샀다.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사람들은 지금 우리 주위에도 많이 있다.]
p 119
  그 후 얼마 안되어 나는 친구 해밀튼의 도움으로 뉴 캐슬의 지폐도 인쇄하게 되었다. 조그만 일도 조그만 형편에선 크게 보이게 마련인데 그것은 역시 큰 이익을 안겨 주었다. ...
  이제 나는 조그만 문방구점도 차리게 되었다. ...
  나는 인쇄소를 개업하기 위해 진 빚을 차츰 갚아가기 시작했다. 상인으로서의 신용과 평판을 얻기 위해 실제로 부지런하고 검소했을 뿐 아니라 그것에 손상을 주는 인상(印象)을 될수록 피하기로 주의를 기울였다. 옷은 평이(平易)하게 입었고, 오락장소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낚시질도, 사격장에도 결코 가지 않았다.
  때때로 책에 정신이 팔려서 일손을 놓는 일은 있었지만 그것은 드믄 편이고 또 눈에 띄는 일도 아니어서 스캔들이 될 수는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흔히 이런 생활을 무미건조하고 재미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생활의 재미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재미의 정도는 다른 오락에 비길 것이 아니다.]
2. 도덕적 결단[잠시 중단 후 1784 년 파리 근교에서 집필을 계속함]
p 130
  나의 형편은 나날이 풀려 갔다. 나는 본래부터 갖고 있던 근검, 절약하는 습관은 버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소년시절엔 솔로몬의 시구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교훈해 주는 것이었다.
"너희는 자기의 천직(天職)에 근면한 사람들을 보았느냐. 그는 왕(王) 앞에 설 것이며, 천박한 사람 앞엔 서지 않을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위의 글은 우리의 현재 성경과 영국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잠언 22장 29절;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Do you see a man skilled in his work? He will serve before kings; he will not serve before obscure men.]
  그때부터 근면이야말로 부귀와 명예를 얻는 수단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문자 그대로 "왕(王) 앞에" 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후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다. 나는 다섯 왕 앞에 섰었으며, 그 중 하나인 덴마크의 왕과 함께 만찬에 나란히 앉는 영광을 누린 적도 있었다.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성공을 하려면 색시를 잘 만나야 한다."
  나나 다름없이 부지런하고 소박한 아내를 내가 만난 것은 그럴 수 없이 복받은 일이었다. 아내는 소책자를 접어 꿰매는 일에서부터, 상점을 지키고 제지업자에게 팔 헌 누더기 조각을 사 모으는 일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흔쾌히 도와주었다. 게으른 하인은 두질 않았으며, 식탁은 간소하고, 또 가구들도 수수한 것들을 놓고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아침이면 빵과 우유를 먹는 생활을 오래도록 계속했다. 차는 안 마셨다. 백납 스픈으로 2 펜스짜리 질그릇에 담긴 음식을 계속 먹었다.
p 133
  나는 장로교도로 교육받고 자랐다. 그 교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 "선민(選民)", "정죄(淨罪)" 등과 같은 것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고, 다른 것들도 회의하고 있었다.
  일요일은 교회의 집회에 나가는 날이라기보다는 공부하는 날이었다.
  그렇다고 종교적인 주장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나는 결코 신의 존재나 천지창조, 또는 섭리의 지배를 의심한 적은 없었다.
  또 하느님이 가장 흐믓하게 여기는 봉사는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일이며, 덕행(德行)은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 이런 것들은 모두 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종교에서 그런 것들을 발견하고 나는 그들을 모두 믿었다. 각각의 종교는 도덕의 예찬이나 고취하는 점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었다. ...
  따라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믿고 있는 종교에 관해서 그들의 신앙심을 약화시킬 토론에는 말려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교파가 어떤 것이든 교회 건립에는 적은 기부금이나마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교회 예배엔 별로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옳게만 운영된다면, 교회 예배는 좋은 일이며 또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임성삼 주(註); 이 분의 마음에는 본인이 교회 예배의 존폐를 자기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p 134
  언젠가는 다섯 일요일을 연거푸 교회에 나간 적도 있었다. ... 일요일의 여가는 독서에 필요하였으나 그래도 계속하여 나갔다. ... 설교의 주제는 빌립보 4 장에 있는 다음 구절이었다.
"형제들이여. 모든 참된 것과, 모든 고상한 것과, 모든 옳은 것과, 모든 순결한 것과, 모든 사랑스러운 것과, 모든 영예로운 것, 곧 덕(德)스러운 것과 칭찬할 만한 것들을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 두시오."
  나는 당연히 도덕적인 문제를 빼놓지 않고 얘기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목사는 사도(使道)들이 교훈하려고 하는 것을 다섯 가지로 묶어서 말했다.
1.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     2. 성서 읽기를 게을리 말 것     3. 교회 예배에 꼭 참석할 것    4. 성찬식에 참석할 것     5. 하느님의 목사를 응당히 존경할 것.
  이들은 모두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설교에서 기대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다음부터는 그들과 만나는 것을 단념하고, 역겨운 생각이 들어 다시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나는 몇 년 전(1728 년)에 조그만 기도서를 하나 썼는데, 기도문의 형식으로 된 개인용의 것이었다. 제목은 "신앙조항과 종교행위". 나는 이것을 사용하기로 하고 교회 예배엔 다시 나가지 않았다. 나의 행동은 남들의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이 이상 변명하지 않기로 한다.
p 136 덕목(德目) 13개 조항
 
내가 도덕적 완성에 이르는 대담하고 힘든 계획을 구상한 것은 이 무렵이다. 나는 언제나 과오를 범하지 않고 사는 것이 소망이었다. 타고난 성품, 습관, 혹시 친구들의 유혹에 의한 잘못까지도 모두 극복하고 싶었다. 나는 무엇이 선이고, 또 무엇이 악인지를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옳은 일을 하고, 그른 일을 피하는 것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오래지 않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가지 과오를 범하지 않으려고 조심을 하다 보면, 어느새 다른 과오가 벌어지고 있어 이따금 당황하곤 했다. 습관은 부주의의 미끼가 되었다. 성벽(性癖)이 때때로 이성을 앞섰다.
  마침내 나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완전한 덕은 우리를 이롭게 한다는 단순한 이론적 신념만으로는 우리의 과실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쁜 습관은 깨어버리고 좋은 습관을 얻어서 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꾸준하고 변함없고 정확한 행동을 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이런 목적을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생각했다.  ...
[임성삼의 주(註); 기본적인 개념은 불타의 생각과 같다.]
  나는 그 당시 절실하게 소망되는 13 가지의 덕목의 명칭을 들고, 그 각각에 간단히 훈계를 붙여서 그 의미의 범위를 똑똑히 표시했다.
1. 절제 temperance; 우둔할 정도로 먹지 말고, 취하도록 마시지 말라.
2. 정숙 silence; 타인이나 자기에게 유익하지 않은 말은 하지 말라. 필요없는 말은 삼가라.
3. 질서 order;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있게 하라. 모든 일은 때를 잃지 말고 하라.
4. 결심 resolution; 해야 할 일을 다 하도록 결심하고, 결심한 일은 반드시 실행하라.
5. 절약 frugality; 타인이나 자신에게 착한 일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돈을 쓰지 말라. 즉 낭비를 말라.
6. 근면 industry;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말라. 항상 유익한 일을 하고 있으라. 불필요한 일을 끊어 버리라.
7. 정직 sincerity; 속임수로 해치지 말라. 깨끗하고 공정하게 사고하라. 말할 때도 그렇게 하라.
8. 공정 justice; 해로운 일, 또 네가 응당 베풀어야 할 은혜를 베풀지 않음으로써 과오를 저지르지 말라.
9. 중용 moderation; 극단을 피하라.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중상을 들을 때는 참으라.
10. 청결 cleanliness; 몸이나 의복이나 주택에 불결한 것이 있으면 그대로 두지 말라.
11. 침착 tranquility; 사소한 일, 일상사나 불가피한 일이 있을 때 마음이 들뜨지 말라.
12. 순결 chastity
13. 겸손 humility;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따르라.
                        [임성삼의 주(註); 어떻게 보면 오만이 아닌가?]
  나는 이런 모든 덕목을 연습으로 익힐 생각이었다. 따라서 한 몫에 그 전부를 성취하기 위해 정신을 분산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다. 적당하게 한 가지씩 하며, 그 한 가지가 다 성취되면 또 다른 것을 습득하고 그래서 13 가지 덕목을 모두 터득할 셈이었다. 한 가지 덕을 익히면 또 다른 덕을 익히는데는 용이하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p 139
  피타고라스의 금언집에 따라 매일매일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나는 그런 검사를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궁리해 냈다.
  조그만 수첩을 만들어, 그 덕을 하나씩 페이지마다 기록했다. 붉은 잉크로 각 페이지마다 칸을 만들고, 한 주일의 나날을 일곱으로 쪼개어 그 두문자로 표시했다. 이 요일난에 가로질러 13 개의 붉은 선을 긋고, 덕을 표시한 두문자를 표시했다. 그리고 각 해당난에 그날의 덕을 반성하고 과오가 발견되면 흑점으로 표시했다. ...
  13 주 동안의 나날을 살펴보고 그 수첩이 깨끗한 채로 있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행복감은 말할 수 없다.
[임성삼의 주(註); 나는 이분의 자서전과 인도의 간디의 자서전은 사실 그대로 믿는다.
 만일 상당히 엄밀한 면이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13 주일 동안 위의 13 항목을 모두 지켰다고 스스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프랭클린은 판단하는 데 아마 위에서 말한 중용의 미덕 즉 극단적인 것을 피하라는 개념을 어느 정도 사용하였을 것이고, 이런 자세가 많은 일을 하며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p 147
  내가 자신에게 강요하는 극단의 정확성은 도덕에 있어서 일종의 겉멋이라 여겨져,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되면 나는 우스꽝스럽게 되고 말며 완전한 인간은 질투와 미움을 사는 거북함이 따르게 마련이다. 자비로운 사람은 친구들의 면목을 지켜주기 위해 그 자신이 약간의 결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때때로 이런 암시를 받고 보면 이성(理性)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체로 내가 열망하던 완성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을 망정, 아니면 그 근처에 가지 못했다고 해도 나는 노력을 통해 더 낫고, 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그나마 노력을 하지 않았던들 나는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좋은 필적을 본따서 완전한 글씨를 습득한 경우와 같아서, 비록 바람직한 걸작까진 못미치나 그 필치는 애를 쓴 만큼은 개선되고, 또 그렇게 바르고 똑똑하게 거듭해서 쓰면 상당히 나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나의 자손들은 다음을 잘 알아두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79 세에 이르도록 인생의 행복을 변함없이 누리며 사는 것도 신의 은총과 함께 이런 조그만 인위적 노력의 보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남은 생애에 어떤 불운이 닥칠지는 하느님만이 아는 일이지만, 정작 불운이 닥쳐와도 이제까지 누려온 행복을 돌이켜 보며 숙명으로 알고 그것을 참아나가는 도리밖엔 없다.
  오래도록 건강을 유지하고, 또 아직도 훌륭한 체격을 지니고 있는 것은 "절제" 덕분이다. 일찍부터 형편이 용이해서 재산을 모은 일이나, 모든 지식을 쌓아 유능한 시민이 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학식있는 사람들 속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근면"과 "절약"의 덕이다. "진실"과 "정의"의 덕은 국민의 신뢰와 함께 영광스러운 임무를 나에게 맡겨 주었다. ...
150
  이 책자에서 내가 설명하고, 강조할 생각이었던 것은 이런 것이다. 인간의 본성만을 떼어놓고 생각할 때, 나쁜 행동이란 그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고, 나쁘기 때문에 금지된 것이다. 그러므로 현세에서도 행복을 소망하는 모든 사람들은 덕행을 쌓아두는 것이 좋다.
  세상에는 맡긴 일을 자기 일처럼 해줄 정직한 사람을 필요로 하는 부유한 상인(商人), 귀족, 국가 혹은 왕후들이 언제나 많은 법인데, 정작 그런 정직한 사람을 찾으려면 드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서 나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확신을 주고 싶다. 성실과 정직이라는 덕목만큼 가난한 사람에게 행운을 안겨주는 것은 없다고...
p 151
  어떤 주장을 고집하기 위해 "확실히"라든가, "의심할 바 없이"등의 표현이나 용어는 피했다. 대신 나는 "...일 것으로 생각한다"거나, "내가 알기로는"하는 표현 아니면 ...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만 ..."등의 말을 쓰기로 했다.
  내 생각으로는 틀린 사실인데도 상대방이 그것을 주장할 때면, 나는 그 모순점을 무뚝뚝하게 지적하거나 그 견해의 부조리성을 지체없이 폭로하는 쾌감을 자제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니면 일정 상황에선 그의 견해가 옳을지도 모르지만 현재엔 내가 보기엔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임성삼의 주(註); 잘은 모르나 위의 것을 익히게 되면 여러분이 2000 년을 맞아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내 태도의 변화는 곧 좋은 반응을 나타냈다. 내가 참여한 대화는 훨씬 명랑하게 진행되었다. 내 의견을 피력하는데 있어서 겸손한 방법은 한결 이해심있고, 반발없이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졌다. 나의 주장 속에 오류가 발견되어도 나는 별로 난처해 하지 않았으며, 내 주장이 옳을 경우에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잘못을 포기하도록 하여, 내 입장을 기꺼이 따르게 할 수 있었다.
  이런 태도는 처음엔 나의 천성과 맞서서 격렬한 반응을 일으켰지만, 결국은 용이하게 나의 습관으로 익혀졌다. 아마 지난 50 년 동안 내 입에서 독단적인 언사가 튀어나가는 것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가 새로운 제도를 제안하거나, 아니면 구제도의 개혁을 주장할 때, 나와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과 더불어 내 의견이 상당한 무게를 지니게 된 것은 주로 이런 습관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3. 새로운 문화  [1788 년 저술]
p 154
1731 년 5 월 19 일 도서실에서 역사를 읽은 소감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아무리 안 그런 체해도 국가를 위한 선(善)이라는 단순한 견지(見地)에서 일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비록 그들의 행동이 진정으로 국가에 이익을 가져왔다고 해도, 그는 그들 자신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합치된다고 생각한 것이며, 덕행의 정신으로 한 것은 아니다.>
<인류의 선(善)을 위해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더욱이나 없다.>
[임성삼의 주(註); 프랭클린은 말로는 독단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글에서는 위와 같이 마음대로 이야기 하였다.]
p 204
  이 무렵 길버트 테넌트 목사는 또 하나의 계획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그가 기부금을 모집할테니 도와달라고 하였다. ... 나는 시민들에게 걸핏하면 기부금을 요청하는 것에 찬성하고 싶지 않아서, 그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랬더니 그는 나의 경험에 비추어 마음이 너그럽고, 공덕심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아는대로 적어 주었으면 했다. 나는 나의 기부금 요구에 기꺼이 응해준 그 사람들에게 새 구걸인을 소개해 주어 폐를 끼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명단도 밝힐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면 조언이라도 듣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그건 말씀드리리다. 우선 제일 먼저 알아둘 것은 기부를 아무 때나 잘하는 사람들에겐 모두 부탁을 해 보십시오. 그 다음은 낼 것도 같고, 안낼 것도 같은 알쏭달쏭한 사람을 찾아가 보시오. 그리고 돈을 낸 사람의 이름을 제시하시오. 마지막으로 아무 것도 내놓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소홀히 다루지 마시오. 어떤 사람의 경우, 당신이 잘못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요."
  그는 껄걸 웃으며, 감사하다는 말고 함께 일러준대로 하겠다고 했다. ... 그는 기대 이상의 돈을 거두었다.
p 211
  어느날 아침 7 시쯤 런던의 길을 걸어보았는데, 그 때는 이미 밝은 낮이었고, 해가 솟은지 3 시간이나 지난 다음인데도 문을 연 상점은 하나도 없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런던의 주민들은 밤늦도록 촛불을 켜고 멋대로 눈을 뜨고 있다가, 해가 뜰 때까지 늦도록 잠을 자면서도 흔히들 양초세가 어떻다느니, 그 값이 비싸다느니 하고 불평하는 것을 보면 좀 돌지 않았나 하게 된다.
[임성삼의 주(註); 이분이 지금의 라스베가스에 가서 하루를 묵는다면 어떤 느낌을 받으실런지... 그러나 이 책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무엇인가 더 나은 방향을 찾을 것이 분명하다.]

  앞에서 소개한 "영국사"를 쓴 앙드레 모로아는 그의 "프랑스사"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독립을 선언한 후에 프랭클린이 빠리로 왔는데 그는 개인적인 위신과  인기로 사명을 달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의 과학자로서의 영예, 예지에 대한 명성, 소박한 풍채, 재치있는 화술 등이 모두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프랭클린의 저서 "리자드 아저씨의 연감"에 실려 있는 철학은 바로 프랑스 시민의 철학이었다. 그의 번개에 관한 실험은 유명했다. ...
  [프랑스의]과학아카데미는 그를 회원으로 선임했으며 그는 규칙적으로 회의에 출석하였다. 그곳에서 볼테르[1694~1778; 프랭클린보다 12 세 위] 와 상봉하게 되어 나이든 두 명사는 열광적인 공중 앞에서 서로 얼싸 안았다. 영국 대사관은 그가 본국에서 인망이 없고 대사라기보다는 망명객이라는 인상을 유포하려고 애썼으나 허사였고 궁정과 시중에서는 위대한 프랭클린의 이야기만이 떠돌고 있었다.
  프랭클린에 대한 전설 같은 화제는 프랑스의 대중의 지성적, 정서적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신 엘로이즈"[1761; 루소(1712~1778)의 소설]와 트리아농궁(宮)의 목장이 인기를 끌고 있던 시대였으며 순박한 정원생활에 열정을 기울이고 있던 시대였다. 사실대로 말하면 프랭클린에게는 전원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었고, 그는 단순하다기보다는 굉장히 예리한 신경을 가진 사람이었다. 요컨대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깨끗이 완수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모피 모자와 안경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어디에나 그 모양으로 나타났다. 무심한 실수로 가발을 쓰지 않고 사절단과 상면했다가 이 부주의로 인한 사고가 도리어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을 알고 우연을 원칙으로 바꾸어 그 뒤부터는 가발을 쓰지 않았다. 빠리 사람들이 그를 퀘이커 교도로 믿고 있는 것을 알고 이것을 부인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
  [프랑스에서는 미국의] 뉴잉글랜드에는 고대 그리스보다도 많은 현인이 있고 대륙회의는 로마시대의 원로원으로 간주되었다. 모든 청년들은 아메리키의 독립 반란군을 위해 싸우기를 열망했다.
  프랑스 함대는 재건계획이 완료되어 1771 년에는 이미 전함 64 척, 순양함 45 척을 헤아리게 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프랭클린은 위의 프랑스 함대를 미국을 위해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므로 영국은 대서양 건너 미국에 많은 군대를 유지할 수 없었다. 독립전쟁 기간에 양쪽 군대는 각기 3 만에서 6 만 사이였다. 만일 프랑스가 프랭클린에 의해 동맹국이 되지 않았으면 영국은 훨씬 많은 군대를 미국에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워싱턴은 독립전쟁 전체를 통해 3 만 이상의 군대를 모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